임흘은 풍천인(豊川人)으로 자가 탁이(卓爾)요 아호를 용담(龍潭) 또는 나부산인(羅浮山人)이라 했다. 소고 박승임에게 배웠고 만년에는 월천 조목, 한강 정구의 문하로 나갔는데, 그분들의 추중을 받았다. 서울에서 출생한 공은 명종12년(1557)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를 그만두고 임란 발발 5년 전 안동의 임현인 내성으로 낙향하여 용담(龍潭)에 집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공의 호는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풍산인 류종개와 김중청, 윤흠신 흠도 형제와 함께 의경을 일으키니 이것이 곧 내성의병으로 공은 부대장에 추대된다. 그 뒤 왜적과 교전 중 의병장 류종개가 전사하자 근시재 김해의 진중으로 달려가 합군하여 진격할 계획을 세우던 중 또다시 근시재가 몰하매 공이 대신하여 그 군대를 이끌고 문경에서 일전을 치른 뒤 당교에서 재전을 치러 수많은 왜적을 격퇴했다. 광해군때는 동몽교관에 제수했으나 불취하고 이이첨 등이 나라를 그르칠 것을 예견, 이로부터 더욱 세사에 뜻이 없어 두문하고 임하에서 독서와 소요로 여생을 마쳤다.
임씨문중
목조와가
조선중기
임 흘 (1557 - 1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