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건물은 고종연간의 대원군 집정시 지어진 주택으로 서울의 창덕궁을 모방하여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집안의 모든 아궁이에서 나오는 연기를 본채 후면에 전석(塼石)으로 쌓아 만든 하나의 굴뚝으로 빠져나가게 한 독특한 구조이다.
- 규모
. 원래 99칸이었으나 6.25동란으로50칸 정도만 남아있다
시대구분
. 조선시대
형태/방법/업적
ㅁ자형 구조를 이룬 본채 좌측에 역시 ㅁ자형의 사랑채가 이어지고, 본채와 사랑채 사이에 행랑(行廊)채가 들어서 있다. 원래는 좌측으로 안사랑채가 달려 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문화재 지정여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호(1973년 8월 31일)
관련 인물 및 유적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고종 연간에 좌산 이만윤이 지었다고 한다. 그는 서울의 창덕궁과 같은 모양의 집을 짓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공사를 감독하였다고 한다. 처음 지었을 때는 99칸 집이었으나, 6·25전쟁 때 일부가 파괴되고 지금은 50칸 정도만 남아 있다.
참고 자료
. 안동문화원,1994,안동군지정문화재편람,영남사(안동),p.102-103
이 집에서는 류기목(柳祈睦)의 맏아들 석호(石湖) 류도성(柳道性)이 태어났다.
석호는 그 뒤 백부인 류희목(柳希睦)에게로 입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