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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해배씨

상세설명

자원 설명

본래, 요람 신라의 6부의 하나인 한지부의 부장 지타를 원시조로 하느 경주 배씨는 신라 6성의 하나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뿌리 깊은 토족 성씨이기도 하려니와, 고려의 개국1등 공신인 배현경 을 중시조로, 대대로 고려에 벼슬, 13세기말~14세기초에 충렬왕~충선왕을 섬겨, 익대좌명공신이 된 전이 흥해군에 봉해지으로 해서 경주에서 흥해로 분적하게 된 흥해 배씨가 안동에 입향하기는 흥해군의 아들 상지, 상공 형제에 의해서이다.
기울어 가는 고려조정에서 판사복시사를 지낸 상지는 이성계에 의하여 고려가 망하자, 절개를 지켜, 동지 718과 함께 송도의 20리밖 광덕산 기슭 두문동에 숨어 항거하다가, 이씨 조정의 모진 박해로 하여, 더러는 장렬히 순절하고, 혹은 흩어지는 판에, 상지는 고려의 전서 벼슬을 지낸 그 아우 상공과 함께 영남으로 향하여, 안동 금계에 짐을 풀고, 절조의 상징으로 솔, 잣나무, 대나무 를 둘러 심어 그 속에 집을 짓고 백죽당이라 편액, 인하여 백죽으로 아호를 삼아, 강개한 울회를 달래었으며, 그 아우 상공은 전날 함께 전서를 지낸 옛 동료 유종혜의 마을인 풍산 하회에 자리 잡아 살았다. 백죽당의 아들 4형제에서 맏아들 권이 사헌부지평, 형조정랑을, 둘째 환이 관찰사를, 셋째 남이 문과급제 이조정랑을 지내고, 넷째 강이 또한 문과급제로 이조정랑을 지냈는데, 모두 문학으로 이 름을 날려,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가리켜 배문이라 일컬었다.
이 4형제의 자손에서 문행이 있고 벼슬에 오른 이들이 많았으며, 백죽당의 6대손 천석이 금계를 떠나, 낙동강 굽이 산수가 절승한 임하면 도목촌에 옮겼고, 그 아들 삼익이 퇴계 문인으로, 문장 글씨에 뛰어나고 황해관찰사를 지냈는데, 그 친우 구봉령이 마을 이름을 도맥으로 부르기를 권했 으나, 그는 과분하다 하여, 도목으로 정했다는 사연이 ′영가지′ 방리조에 전한다. 임연재의 아들 용길이 김학봉 유서애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에 의병장으로 공헌, 원종훈에 책록되고, 문학으로 알 려졌으며, 그 아래로도 문행있는 선비가 많았다. 안동호로 하여, 4백여년 세거의 터전인 유서깊은 도목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매, 4306년(서기 1973) 그 종택은 임하면 송천동에 옮겨 옛 모습대로 이룩했으며, 삼익이 명나라 사행길에 신종황 제로부터 상으로 받은 옥저 앵무배등 값진 유물들이 보존되어 오는데, 그 중에는 삼익이 선조 21 년, 황해감사로 해주에서 몰하여, 고향으로 운상하는데 쓰였던 상영, 사인교등이 있는바, 그 상여 는 지금 우리나라에선 가장 오래된 것이다. 입향 6백년의 흥해 배씨는 자못 번성한 편이여서, 모두 1천여호에 달한다고 하는데, 그 분포를 보면 안동에 약 5백호, 영주에 50호, 봉화에 약 1백호, 예천에 1백호, 의성에 1백호, 영양,청송에 약 1백호, 대구에 약 1백호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