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면 온혜동의 풍천 임씨는 학자로서,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용담 임흘을 입향조로 한다. 풍천 임씨는 본래 중국 송나라 명족으로, 원에 벼슬하면서, 시집오는 그 나라 공주를 쫓아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고려의 어사대부가 됨으로, 인하여 풍천(황해도)의 세족으로 지체 있는 가문을 이루었다.
조선초에 수안군수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임한의 아들 소간공 임유겸이 성종때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올라, 대사헌, 한성판윤, 공조판서, 지중추부사를 역임,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나라일로 명나라에 3차례나 다녀온 바 있는 명신이었는데, 그는 바로 안동에 입향한 임흘의 증조부다.
조부 임건은 함양군수를 지냈으며. 임흘은 박승임, 조목의 문인으로 일찍 문예를 이루고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영달에 뜻이 없어, 영남땅에 내려와 안동부 내성현 용담(지금 봉화군 해저 건너편)에 자리잡고, 한결같이 학문에 힘쓰다가, 임진왜란때 유종개, 김해등과 함께 국난 극복에 이바지하고, 동서당론을 개탄, 벼슬을 뿌리치고, 예안 용두산 아래 숨어, 산수를 벗하여 글을 읽으며 자적했다.
′안동읍지′에 의하면 광해군때 문과에 올라 인조때 사헌부지평을 지낸 임숙영이 문장에 뛰어나고 경사에 밝았으며, 임흘의 증손 임세핵이 학행, 문장으로 알려졌고, 또 그의 증손 임희발이 효행이 독실했으며, 임흘의 10대손 임문호가 구한말 2차 의병운동에 겨우 20세 청년으로 왜적 토벌에 공을 세우고, 왜군주둔소를 습격하다가 체포되어 대구에서 순국했다.
풍천 임씨는 안동에 정착이래 4백년을 세거해 왔으나 근래에는 문경, 영덕등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풍천 임씨의 종가는 도산면 온혜의 옛터전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