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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류씨

상세설명

자원 설명

임동면의 무실, 박실, 한들 등 아래 위 3개 마을을 터전으로 하여, 동족부락을 이루어 세거해 오 는 전주 류씨는 정착 3백여년에 과환도 많았던 편이기는 하나, 학행을 숭상하여, 도학, 예학의 대 가들도 많이 내고, 행실에 문한을 갖춘 선비가 무리로 잇달아, 무실 류씨로 일컬어지는 이곳 전주 류씨는 영남에서 꼽힐만큼 명문으로의 지체를 다져왔다.
선비 유성을 입향조로 하는 이곳 전주 류씨는 고려 말기에 완산백에 봉해진 유습을 시조로 하며 그 증손 의손이 세종때 문과급제로, 집현전 제학을 역임, 세종문운에 크게 이바지하고, 삼조를 이 어 섬겨,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세조의 벼슬을 거부, 제주에 유배되었으며, 통례원 인의를 지낸 그 증손 윤선이 서울 묵사동을로부터 영천(지금 영주)으로 옮겼고, 그 아들 성이 내앞(임하면 천 전동)의 성 김씨에 장가들게 된 데서 비로소 내앞에서 가까운 무실에 옮겨 정착하게 된 것이다.
입향조인 성의 아들 복기, 복립 형제가 함께 그 외숙 학봉 김성일의 문인으로 기봉은 임진왜란 에 의병으로 공헌하고 예빈시정을 지냈으며, 복립이 역시 임진왜란에 외숙 학봉의 휘하에 종군, 진주성을 방어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등과 자결, 충신으로 정려되었다.
이 곳의 전주 류씨는 모두 기봉의 후손으로, 매우 번성하여, 무실을 본산으로 하여, 박실, 한들, 마재, 고래골 삼산(월곡면)등에 취락을 이루어 세거해 오는데, 과환으로는 홍패(문과) 열두장에, 백패(진사, 생원) 37장으로 목사를 지낸 정휘, 장령으로 청백리에 오른 경시, 승현이 공조참의, 관 현이 형조참의, 정원이 대사간, 치명이 병조참판 지호, 치윤이 함께 돈녕도정, 긍호가 군수등으로, 모두 밝은 치적으로 칭송이 있었거니와, 이들은 모두 학문으로 일가를 이룬 이들이었으며, 그 중 에도 관현, 정원은 목민관의 본보기로 정다산도 ′목민심서′에서 이들의 밝은 치적을 일컬었다.
학행으로 우잠, 직, 범휴 휘문, 정문등이 다 사림에 추증되었고, 예학을 집대성한 장원은 대표적 인 예학자였으며, 치명은 퇴계의 학통을 이어 영남 유학의 거봉을 이루었고, 경술국욕을 전후하 여,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장렬히 순국한 시연, 역시 합방을 전후하여 신채호, 이상재등과 함께 사회개혁, 교육, 항일운동에 크게 이바지한 선각적인 학자 의사 인식, 유림대표로 ′파리장서′운 동에 주역이었던 필영, 중국에 망명,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약하는 등 구국제단에 생애를 바 친 유림, 60만세운동에 학생대표로 활약한 면희등 여기 전주 류씨는 실로 많은 인물을 냈다. 문집 은 모두 62질을 냈다. 이 곳 전주 류씨는 모두 2,000여호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