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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이씨

상세설명

자원 설명

학가산에서 떨어진 한 갈래 지맥이 30여리를 남으로 뻗어 풍산읍 동쪽을 에워두른 하지산(下枝山),와우산(臥牛山) 기슭에 기대어 서남으로 활짝 열린 풍산평야를 앞에 깔고 남북으로 길다랗게 자리잡은 서남향 마을이 예안이씨 문중이 400여년을 세거해 온 풍산 우렁골 곧 풍산읍 상(上)·하리(下里)이다. 본래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시조인 고려개국 공신 도(棹)의 9대손 익(翊)이 고려의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으로 예안군(禮安郡)에 봉해짐으로서 본관을 예안으로 분적(分籍)하였다.
예안군 익의 아들 승(昇)이 문과급제로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를 지냈으며 그 아들 송( )이 또한 문과급제로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내고 우왕 14년(1388) 염흥방의 화에 연좌되어 화를 입은 바 되었고 무신이며 과학자로 야인(野人)정벌에 공을 세우고 천문학 기계를 발명 제작하여 세종조의 눈부신 문운(文運)에 크게 기여한 익양공 천(翼襄公 )이 바로 송의 아들이었으며 천의 5대손 경정(慶정)이 이괄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워 3등 공신으로 전평군(全平君)에 봉해져 그 후손이 지금 예안에 약 200여호가 살고 있다.
천의 아우 온( )이 이조판서를 지내고 온의 증손 명(蓂)이 문과급제로 명종때 좌의정으로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명의 백부 필간(弼幹)의 아들 영(英)이 연산군때 잦은 사화와 중종때 기묘사화를 치르고 세정이 불안하여 그 아우 전(筌)·훈(薰)·종제 명과 함께 낙향하여 풍산에 정착했으니 이들이 풍산 우렁골 이씨의 입향조로 그 형제들의 후손 300여호가 동족부락을 이루어 우렁공 아래, 윗마을에 의초롭게 살아온다.
입향조인 영의 맏아들 숙인(淑仁)이 집현전참봉, 그 아들 공(珙)이 진사를 거쳐 문과급제하고 군수(郡守)·교리(校理)·지평(持平) 등 연달아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라일보다 당파싸움으로 어수선한 조정이 못마땅하여 아예 벼슬을 외면하고 향리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했다.
전의 아들 홍인(洪仁)이 잠시 현감을 지내고 물러와 있다가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향토수호에 몸을 바쳤으며 훈의 손자 진(珍)이 임진왜란에 공헌하여 원종훈(原從勳)에 책록되고 그 현손 유장(惟樟)이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 성리와 예학에 밝아 학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 후손에 효행으로 정려된 한오(漢五), 그리고 학행으로 정국(楨國)·정보(楨輔)·상진(象辰) 등 문한(文翰)으로 알려진 이들이 많다.
숙인의 아우 대인(大仁)이 군자감정(君資監正)을 지내고 그 처가 마을인 말바우에 옮겨 살아 와룡파조가 되었다.
시끄러운 세상을 피하여 낙향한 선조의 맑은 유풍을 이어 내려 전야(田野)에서 학문과 행실을 닦기에 힘써 진사 30인, 문과급제 2인에 문집이 13질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