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예천 임씨가 임하 금소에 터전을 열어 정착하기는 야은 임억숙에 의해서라고 하니, 중종 무렵쯤일 듯 짐작된다.
본래는 명족으로 일컫던 가문으로, 고려 중기에 시문의 대가로, 이인로등과 함께 강좌칠현의 한 사람으로 크게 울렸던 서하 임춘을 시조로 하는 이 곳 금소의 예천 임씨는 시조로부터 4대인 즐 이 고려말에 영천군수에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던지고 물러와, 이태조가 여러번 불렀으 나 신절을 지켜 나가지 않았으며, 그 아버지 상사에 무덤곁에 막을 얽어 3년을 슬퍼하여, 효행으 로 정려되고, 그 손자 자번이 형조판서를 지내고 양양군에 봉해졌다.
세산 유지호는 임만휘의 묘명에서 ′임씨는 본래 알려진 명문으로 중세이후에는 귤이 회수를 건 넌듯한 감이 없지 않다.′라고 했거니와, 여기 금소에 뿌리를 내린이래 비교적 현달한 인물이 적었 던 편이라 하겠다. 야와 세명과 농와 근명이 함께 갈암 이현일의 문인으로, 학문에 독실하고 행실에 힘써, 스승 갈 암이 칭찬했으며, 현손 만휘가 수정재 유정문의 문인으로 학행이 있었고, 그 아들 응성이 정재 유 치명의 문인으로 또한문행이 있었으며, 척암 김도화의 문인으로 소한이 문행이 있었으며, 만문의 아들 응룡이 무과로 호군을 지내고, 응문이 동추, 응환이 호군이었으며, 명한의 아들 병두가 무과 급제로 형해부사등 다섯 고을의 수령을 역임, 치적이 있었고, 소한의 아들 병표가 동추 그리고, 광한이 감찰, 도한이 사과, 병운이 오위장을 지냈다. 금소의 예천 임씨는 약 6백호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