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부사(善山府使)를 지낸 이유선(李惟善을) 입향조(入鄕祖)로 하는 영춘이씨가 주하 창동(周下 蒼洞)에 정착하기는 15세기 후반(세조-성종) 무렵으로 추정된다.
아주 옛날부터 두루로 불려온 와룡면(臥龍面) 주하리(周下里의) 유래를 더듬어 보면 영가지(永嘉誌)에 "옛날에는 주촌(周村)이라 일컬었는데 지금은 이로촌(二老村)으로 고쳤다. 군기시시부정(軍器寺副正)을 지낸 이운후(李云候)가 처음 터전을 정하여 살았다" 라고 하였으며 와룡지(臥龍誌)에는 "부정공(副正公)의 아들 정(禎)이 선산부사를 지내고 돌아와 여기에 은퇴를 하였다.
永春李氏 유선(惟善)이 또한 선산부사를 지내고 여기에 살았는데 이 두분이 한 마을에 함께 늙었으므로 이로촌(二老村)이라 하였다. 라고 하였다. 영춘이씨는 창동에 정착한 뒤 600여년에 겨우 수십 호로 가문을 이어오고 있으나 문행(文行)이 연면(連綿)하여 조촐한 지체를 유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입향조인 유선의 맏아들 주(疇)가 사정(司正), 룰째 성(晟)이 문과급제, 주의 아들 승휘(承暉)와 그 아들 자운(子芸)이 함께 진사, 승휘의 아우 승절(承璽)이 성균관 생원, 유선의 6대손 응별(應鼈)이 세자익위사 인의(世子翊衛司 引儀) 응별의 아우 응타(應 )가 생원으로 임진왜란에 의병 전향유사(典餉有司)로 공헌하였으며 고종때 욱성(郁成)이 진사(進士)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