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없음

영해박씨

상세설명

자원 설명

임하면 기사촌은 본래 속칭 기설어촌으로 고려가 망하자, 사간 권정이 벼슬을 버리고 와서 살 게 됨으로하여 뒷사람이 마을 이름을 기사리라 했느니라하고 또 ′현감 박구가 이어 살다′라고 ′영 가지′에 전하거니와, 기실어로 일컬어 오던 이 마을을 기사리로 고쳐 부르게 한데는 권사간과 함 께 현감 박구가 있음을 아는 이는 적다.
척암 김도화의 박구 묘명에 ′ 이성계가 건국하매, 포은, 야은, 목은이며, 두문동 칠십이팔은 죽기 로써 굴복하지 않았고, 운봉현감 박송이 또한 벼슬을 던지고 복주 기산아래 숨어, 시가에 회포를 붙이다′라고하여 ′본래 마을 이름이 기실어였는데, 박공이 돌아오고 인하여 기사리라 일컫다′라고 했으며 하계 이가순의 ′온동유적후기′에도 같은 사연으로 적고, 퇴계 선생이 봉송정 시를 지어 돈 옹의 절조를 기렸다고 했다.
신라 파사왕의 후예로, 눌지와때의 충신 박제상을 시조로 한다는 영해 박씨가 기실어 마을에 입 향하기는 고려말에 용만현감을 지낸 영필에서라고 하며, 벼슬을 던지고 물러와, 여기에 숨어 봉송 정을 얽어 어조를 벗하여 울회를 달래며 여년을 지웠고, 뒤에 단종임금이 그 숙부 수양에게 왕위 를 빼앗길 때 영해 박씨 문중에서는 7의사가 났다고 하여, 영해 박씨는 박제상이래의 충의의 기 맥이 혈통을 타고 연면히 전해졌다고 했으며, 뒤에도 문행있는 이가 이어 나서 가문의 전통을 떨 어뜨리지 않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