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래는 신라왕족 金씨, 고려 태조가 權으로 賜姓
고려 창업공신 권행(權幸)을 시조로 하는 안동 권씨는 같은 고려 창업공신인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안동 김씨와 더불어 이곳을 본관으로 하는 두 줄기의 저성(著姓)이 된다.
안동 권씨는 본래 신라 왕족인 김씨로 경순왕 3년 겨울 후백제의 견훤이 대군을 몰아 이 고을에 침입, 고려태조와 대치했을 때 김행(金幸)은 이 고을 성주 김선평, 그리고 이곳 지도급 인사 장정필(張貞弼)과 함께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병산에서 견훤의 팔천대병을 함몰시키고 김선평·장정필과 의논, 고을을 들어 고려에 항목하였다. 항복을 제창한 김행의 공을 가상히 여긴 고려 태조가 『정세를 밝게 판단, 잘 권도(權道)를 취했다. 』는 뜻에서 『權』이라는 성을 준 것이 안동 권씨의 유래다.
이리하여 성을 받은 권씨는 이래 천 여년에 한결같이 크게 번성하여, 대를 이어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며, 모두 一四갈래로 팔도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 안동 권씨 十四파의 계보는 대략 다음과 같다.
수중(守中) 공파 : 수중을 파조로 한다. 복계군(福溪君) 정(貞) 등이 있다. 영풍(榮豊) 단산(丹山) 등지에 산다.
부호장(副戶長) 공파 : 고려 부호장(副戶長) 시중을 파조로 한다. 신기도령 (神騎都領) 만기(万紀) 등이 있다.
추밀(樞密) 공파 :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수평(守平)을 파조로 한다. 고려, 조선에 걸처 가장 많은 인물을 냈다. 충렬왕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단.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를 지낸 보. 찬성사(贊成事) 준(準). 적(適). 형( ). 용(鏞). 호(鎬). 문하부사(門下府事) 균(鈞). 직제학(直提學) 주(鑄). 찬성사 충(衷)등 명신이 많으며, 조선시대 성리학자이며 문학의 대가인 양촌(陽村) 근(近). 용비어천가를 지은 제(嗇).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지은 남. 成宗때 判書를 지낸 찬( ) 右議政을 지낸 균(鈞). 明宗때 領議政을 지낸 철(轍). 행주대첩(幸州大捷)의 명장 율(慄). 宣祖때 대시인 필( )등 시호(諡號)를 받은 사람이 二六인, 봉군(封君)이 二五인 에 이른다.
복야(僕射) 공파 : 고려 상서좌복야 상장군(尙書左僕射 上將軍)을 지낸 수홍(守洪)을 파조로 한다. 고려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자여(子與). 우정승(右政丞) 한공(漢功) 등이 있으며, 조선에 인(靷). 개( ). 주(柱). 질. 전( ). 벌( ). 호문(好). 위(暐)등 명인 학행이 많다. 안동 가일, 솟밤, 도촌, 송사, 요촌, 봉화 닭실, 예천 저곡, 안의, 진해, 상주, 정읍, 부여 임천, 영천. 입암등 여러 곳에 분포 되어 있다.
동정(同正) 공파 : 고려 호장동정(戶長同正)을 지낸 체달( 達)을 파조로한다. 화원군 희학(花原君 喜學)등이 있다. 안동 법상, 길안 용계에 산다.
좌윤(佐尹) 공파 : 고려 호장(護長) 좌윤을 지낸 지정(至正)을 파조로 한다. 世宗때 좌의정을 지낸 진(軫). 단종(端宗) 충신 산해(山海)등이 있다. 경주 국동. 비안 석정. 감천. 석남에 산다.
별장(別將) 공파 : 고려 별장을 지낸 영정(英正)을 파조로 한다. 춘란(春蘭). 태일(泰一) 부자. 임진왜란 의병장 希仁등이 있다. 와룡. 의성 신평 등에 산다.
부정(副正) 공파 : 고려 식록부정(食祿副正)을 지낸 통의(通儀)를 파조로 한다. 홍건적난에 공헌한 자형(子衡). 현덕왕후의 아버지 전(專). 자신(子衡). 명종(明宗)때 판서(判書) 예 등이 있다. 와룡 눌곡(臥龍 訥谷). 군위(軍威). 영해(寧海) 등에 산다.
시중(侍中) 공파 : 고려 시중을 지낸 인가(仁可)를 파조로 한다. 成宗때 판서를 지낸 함( ). 肅宗 때 좌의정을 지낸 돈인(敦仁) 등이 있다.
중윤(中允) 공파 : 고려 戶長 中允을 지낸 숙원(叔元)을 파조로 한다. 진사(進士). 군수(郡守)등이 있다.
대의(大宜) 공파 : 고려 호장을 지낸 大宜(太師 幸의 九대손)을 파조로한다.
추밀(樞밀) 공파 : 고려 호장을 지낸 樞를 파조로 한다.
검교(檢校) 공파 : 고려 검교 대장군(檢校 大將軍)을 지낸 척(倜)을 파조로 한다. 고려 절신(節臣) 정(定). 中宗때 대사헌(大司憲) 민수(敏手)등이 있다. 함창(檻倉). 영주(榮州)등에 산다.
군기감(軍器監) 공파 : 군기감을 지낸 사발(思拔)을 파조로 한다. 첨의평리(僉議評理) 윤명(允明)등이 있다.
※ 西後 솟밤 安東 權씨
( 松巖 權好文을 前後로 文行을 갖춘 선비로 이어짐)
安東市에서 豊山쪽으로 약 一五리쯤, 松夜橋에서 西後방면으로 한마장쯤 들어가노라면, 나즈막한 산발을 배경으로, 앞에는 들을 놓고, 동남향으로 수십 집의 농가가 자리한 작은 동네가 안동권씨와 진양(晋陽) 하씨가 함께 살아오는 솟밤 마을이다.
안동 권씨 복야공파의 한 갈래가 이 마을에 정착하기는 고려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낸 권인(權靷)으로 비롯된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이곳에 숨은 권인은 조선 태조가 벼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고려 옛 서울 송도를 잊지 못해, 스스로 호를 송파라 한 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
그 아들 후(厚)가 응양위중령( 揚衛中領)에 중랑장(中郞將), 그 손자 계경(啓經)이 현감을 지냈으며, 계경의 아들 개( )가 음보(陰補)로 부사정(副司正)에 기용되었다.
世祖의 임금자리 강탈에 많은 義로운 이들이 참혹한 화를 입게 되매,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은거(隱居)한 개( )는 종의 등에 업혀 서울을 빠져나와 봉화(奉花)의 외가에 숨어 자란 사육신(死六臣)의 한 분인 하위지(河緯地)의 조카 하원(河源)을 사위로 맞이하여, 집과 토지를 주어 이웃에 살게 하니, 하원이 위지의 양자로 그 자손이 여기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개( )의 아들 숙형(叔衡)이 별시위사맹(別侍衛司猛), 숙형의 증순 몽두(夢斗)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용양위부호군(龍 衛副護軍), 그 아우 몽참(夢參)이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풍현도대장(豊縣都大將)으로, 다인(多仁)에서 적을 무찔렀으며, 몽두의 아들 기(紀)가 안동의 첫 향토사(鄕土史)인 영가지(永嘉誌)를 편찬했고, 기의 조카 사도思道)가 무과(武科) 급제로 절제사(節制使)를 지내고, 임진왜란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크게 활약했다.
숙형의 아우 숙균(叔均)이 진사(進士), 그 손자 호문(好文)이 퇴계 문인으로, 진사에 오르고, 깊은 학문에 덕행을 아울러, 나라에서 여러 차례 벼슬로 불렀으나 사양하고, 청성산(靑城山) 아래 연어헌을 지어 후진을 기르며 초연히 물외(物外) 자적(自適)했으며, 호문의 아들 행가(行可)와 그 현손 덕수(德秀)가 함께 진사로 문집(文集)을 남겼고, 덕수는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숙형의 증손 호신(虎臣)이 생원(生員), 호신의 아들 성오(省吾)가 문과(文科)급제로 정랑(正郞)을 지내고, 한성(翰成)이 進士, 개( )의 아우 곤(琨)이 선략장군(宣 將軍), 곤의 아들 사빈(士彬)이 進士로 道村에 옮겨 정착했으며, 문과에 올라 정랑(正郞)을 지낸 장(檣), 우찬성(右贊成을)을 지낸 벌( )은 다 사빈의 아들이다.
충재(庶齋)가 봉화에 옮겨 살아 닭실 파를 이루었다.
※ 豊川 佳日 安東 權씨(복야공 파)
영가(永嘉)의 거족(巨族)인 안동 권씨 一四파의 하나인 복야공파의 한 갈래가 五백년을 세거(世居)해 오는 가일 마을은 그 자리잡음부터 예사롭지 않다. 안동의 진산(鎭山)인 학가산(鶴駕山) 의 한 줄기가 서남으로 달리다가, 풍산평야의 서북 모서리에 이르러 우뚝하니 정산(井山)을 일으켜 동서로 두 봉우리를 나란히 세웠으며, 그 동쪽 가지가 활처럼 휘어 서남으로 굽어 청룡을 이루고, 그 서쪽 가지는 주춤주춤 뻗어 내리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청룡 머리를 마주보며 사뿐히 동구를 이루었는데, 이 井山 앞 기슭에 아늑히 감싸인 남향 마을이 바로 佳日이다. 뒤에는 갈피갈피 암(岩)으로 무늬를 이룬 예쁜 봉우리로 병풍을 두르고, 동구에는 아름다운 경치에 지곡(枝谷)못이 井山에 안긴 마을 그림자를 잔잔한 물결 위에 아로새겨 천연의 산수화를 이루며, 앞에는 영남에서도 손 꼽히는 풍산평야 기름진 벌판이 시원스레 열리고, 들녘 한 끝으로 영남의 젖줄기인 낙동강이 동서로 누벼 흘러, 웅혼가려(雄渾 佳麗)한 풍광과 어울려 산수의 利를 고루 갖춘 천혜의 마을이다.
고려엔 王씨에 이어 풍산 류씨가 살아 왔다는 이 마을에 안동 권씨가 깃들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였다. 世宗때 正郞을 지낸 권항(權恒)으로, 이 마을의 부호였던 장인 유서(柳 )로부터 부근의 임야며 많은 전답을 물려받아 여기에 전거(奠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손이 마을 주인으로 五백년을 누려 오면서 문한(文翰)이 연면했으나 영달을 탐하지 않는 맑은 기풍을 이어내려 주로 실천 도덕의 선비들이었으며, 구 한말(舊韓末)에서 왜정(倭政)무렵은 구국(救國)운동에 이바지한 지사(志士)들이 여러분 있었는데, 그 중에는 이역에서 광복 대업에 생애를 바치면서도 좌익에 가까이 했다는 이유로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못하게 된 이들도 있다.
자연 환경이 아름답고 풍요로움 위에 인정은 더욱 순후하고 두터워 예로부터 가일의 지주(地主)집들은 추수때 작료를 아무리 박하게 가져오거나, 혹 어쩌다가 사정에 의하여 작료를 전혀 못내는 소작인이 있어도 그를 따지거나 독촉하는 법이라고는 아예 없었다고 하며, 몇몇 큰집은 여러 칸의 널찍한 사랑방을 마련하여 대문을 활짝 열어두고 오가는 과객을 맞이하여 한결같이 따뜻한 대접으로 나그네들이 몇 날이건 머물고 싶은대로 머물게 했고, 떠날 때는 일일이 행자까지 주어 보내곤 했으며, 이웃 가난한 집의 큰일에는 매양 돈과 물건을 넉넉히 베풀었고 먼 고장에서 우거해 오는 이가 있어도 온 마을이 살뜰히 맞이하고 도와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보살피는 등 향상 느긋하고 훈훈한 인정으로 온 이웃이 한결같이 화기가 넘쳤다고 하니 가일은 실로 이름 그대로 아름답고 밝은 마을이라 하겠다.
※ 臥龍 늪실(눌곡 訥谷) 安東 權씨 (부정공 파)
안동 권씨 一四파의 한 갈래인 부정공(副正公) 파는 본래 부내 성곡(화성동)에 살았다.
고려 중기 신기도령(神騎都領)에 식록부정(食祿副正)을 지낸 통의(通義를 파조로 하여 그 아들 경보(景輔)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 상장군(上將軍)이었고, 그 아들 휴(休)는 전이시주부(典儀侍主簿), 또 그 아들 정평(正平)은 판도랑(版 郞), 또 그 손자 자형(子衡)이 홍겅적(紅巾賊)난리에 공민왕(恭愍王)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安東 府北 감마촌(甘麻村), 이장동(伊莊洞) 등지에 논 십결(十結)과 산 십리(十里)를 하사받고, 병마단련사(兵馬鍛鍊使), 삼등현령(三登縣令)을 지냈으며, 그 증손 징(徵)이 세종(世宗)때 문과(文科)급제, 병마평사(兵馬評事)로 이시애(李施愛)난에 순국하고, 그 증손 위기(偉器), 대기(大器)가 진사(進士)로, 경학(經學), 행검으로 추중(推重) 되었으며, 위기의 아들 선(宣)이 進士에 文科급제, 대기(大器)의 아들 우(宇)가 進士로 세자사부(世子師傅), 굉(宏)이 進士로 세자시강원부솔(世子侍講院副率)을 지내고 정묘호란(丁卯胡亂)에 江華에 호종(扈從)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성(宬)이 생원(生員), 환( )이 進士 文科로 직강(直講)이 되고, 면과 그 조카 익형(益亨)이 각각 생원이어서 그 형제 숙질사이에 進士. 文科에 오른 이가 무릇 九人이나 되는 등 한때 문한(文翰)으로 크게 울렸다.
자형(子衡)의 조카 당( )이 직장(直長) 그 아들 거약(居約)이 현감(縣監) 그 손자 예( )가 중종(中宗)때 進士. 文科로 판서(判書). 우참찬(右參贊)을 지냈다.
고려 충목왕(忠穆王)때 효자로 정려된 백종(佰宗)의 아들 전이 예조판서(禮曹判書). 한성(漢城)판윤(判尹)에 바로 그(專)의 따님이 문종(文宗) 왕비(王妃)인 현덕(顯德)왕후(王后) 였으며, 그 외손자 단종(端宗)임금이 수양(首陽)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예조판서를 지낸 그 아들 자신(自愼)이 성삼문 등과 더불어 端宗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자신의 어머니 최씨, 아우 자근(自謹) 교리(校理)를 지낸 그 조카 저(著) 서(署) 등이 함께 처형되어 「莊陵誌」에 오르고 영월(寧越)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서(署)의 아우 책(策)도 연좌되어 영해(寧海)에 귀양갔다.
端宗의 화를 겪은 뒤 이 집들은 안동을 떠나 풍기 등두들(지금 교촌2동)에 옮겨 살다가 임진왜란 때 종손 익창(益昌 宣의아들)이 늪실에 옮겨 정착했고, 端宗의 외가인 화산부원군 전(專)의 자손은 참혹한 화를 겪고 간신히 혈손을 남겨 군위(軍威) 노매실(孝令面 老杏洞)에 뿌리를 내려 세거(世居)하며, 영해(寧海)에 귀양갔던 책(策)의 자손은 그대로 영해(寧海) 땅에 정착하여 크게 번성 五백여호가 살고 있다.
※ 吉安 龍溪 安東 權씨
安東 權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權幸의 자손인 권책(權冊)이 스스로 호장(戶長)을 구하여 一O여대를 세습했다. (호창: 고려 초 지방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성주나 호족에게 임명했던 향직)
책(冊)의 후손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가장 처절한 격전장이었던 쌍령(雙嶺) 싸움에서 공을 세워 계공랑(啓功郞)으로 동지중추(同知中樞)에 오른 세익(世益)이 청(淸)나라에 항복에 울분을 품어 초연(超然)히 세상을 잊고 와룡산(臥龍山) 기슭 도연(陶淵) 언덕위에 숨어 지내는 표은(瓢隱) 김시온(金是 )을 따라 함께 숨어 가난을 달게 여기며 표은(瓢隱)을 사사(師事)하여 독실히 닦으매, 표은이 「獨海淸 季世英後 道在0瓢 理000 」一六자를 써 주어 격려하기도 했다.
이래서 약산(藥山) 남쪽 기슭 골 깊고 물 맑은 와룡산(臥龍山) 용계(龍溪)에 그 자손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세익(世益)의 아들 후중(後重)이 군기감조(軍器監造)의 공으로 동지부호군(同知副護軍)에 오르고 그 아들 시창(是昌)이 횽년에 재민 구호에 공이 있어 절충장군 첨지중추(折衝將軍 僉知中樞)에 올랐으며 시량(是亮)이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예학(禮學)에 깊었으며 문망(文望)이 있었으며, 시창(是昌)의 아들 순경(舜經)이 성균생원(成均生員), 그 아들 순기(舜紀)가 영릉참봉(英陵參奉)으로 함께 문행(文行)으로 일컬었다, 순경의 아들 흡이 효행(孝行)이 뛰어나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고 그 손자 주신(周新), 상신(相新), 호신(虎新), 그 아래 영주(寧周)등이 다 文行이 있었고 文集을 남겼다.
※ 奉花 닭실(酉谷) 安東 權씨
금닭이 알을 품는 형국(金鷄抱卵)이라 해서 마을 이름이 닭실(酉谷)이다.
옥저봉(玉저峰) 줄기로 앞을 감싼 닭실 마을은 닭의 둥우리처럼 아늑한 느낌인데 멀리 동북쪽 문수산(文殊山)에서 근원한 창평천(昌坪川)이 마을을 안고 흘러 동구 밖에는 맑은 여울이 흰 바위를 씻어 흐르는 泉石의 美가 운치로우며 그윽하고 조용함이 세상 밖의 別境이 있었다고 옛 文獻은 전한다.
중종(中宗)때 충재(庶齋) 권벌(權 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고 나서 도계촌(道溪村. 북후 도촌)에서 이곳으로 전거함으로 닭실 權씨로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사화(士禍)로 파직된 충재(庶齋)가 닭실에 물러와 숨어 지내면서 집 옆에 충재정사(庶齋精) 청암정(靑巖亭)을 짓고 독서(讀書)와 소요(逍遙)로 애국(愛國)의 울회(鬱懷)를 달래기 一四년, 中宗 二八년(1533) 복직되어 형조참판(刑曹參判). 한성판윤(漢城判尹) 우의정(右議政)겸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등을 거처 명종(明宗)초에 원상(院相)을 지내고 동 一一년(1547) 량재(良才)역 벽서(璧書)사건에 연루되어 구례(求禮에 유배, 삭주(朔州)에 移配되어 移所에서 몰한바 되고, 宣祖초에 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그로부터 닭실엔 文風이 크게 떨침과 함께 가문이 번성하여 충재의 아들 東輔(동보)가 郡守, 동미(東美)가 縣監을 지내고, 손자 래(來)가 군자감정(軍資監正), 채( )가 현감, 현손인 음( )이 文科에 올라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지냈으며, 進士를 거처 文科에 올라 수찬(修撰)을 역임, 詩. 書. 畵에 능하고 百科事典的 博學이라고 불려지던 창운 두경(蒼雲 斗經), 文科에 올라 校理를 지낸 두기(斗紀), 進士로 工曹佐郞을 지낸 두인(斗寅) 등 庶齋의 五대손인 斗字 항렬에서 學行과 文章을 겸한 인물이 무리로 나와 세상에 二八두로 일컬었는데, 닭실 權씨는 이 무렵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四백년 지체를 누려온 닭실엔 많은 遺蹟이 보존되어 오는데 庶齋의 한원일기(翰苑日記) 二책, 堂後日記 二책, 中宗一三년 승지로 있을 때 日記, 栗谷의 백담일기(石潭日記) 등 七책은 史料로서도 매우 중요한 文化財이다. 그외 寶物로 지정된 수진근은록(袖珍近恩錄)이 종택에 보존되고, 충재가 은거하던 庶齋精舍, 청암정(靑岩亭), 석천정(石泉亭) 충재를 재사 지내는 삼계서원(三溪書院)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