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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씨

상세설명

안동에서 대구방면으로 통하는 국도를 따라 약 30리- 갈라산에서 떨어져 서남으로 뻗어내린 줄 기가 동실동실하니 도사린 구릉을 배경으로 자리한 서남향마을 소호리는 들 건너 멀찌감치 동남 의 향로봉과 서쪽의 서산을 잇는 예쁜 산줄기를 성벽처럼 두르고, 의성 온 고을의 골짝을 씻어 내린 그 숱한 개천이 한데 어울려 낙동강으로 달리는 미천 맑은 냇물이 앞들 한복판을 동-서로 꿰어누벼, 자못 시원하고 아름다운 풍광이다.
마을 이름이 소호리로 된 것은, 옛날에 이 마을 서편에 널따란 호수가 있었고, 고려때 시랑을 지 낸 소씨가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연유라고 전해 온다.
옛 문헌에 의하면 소호의 경계는 인근의 고작으로, 거울같은 호면에 그림자를 드리운 울창한 송 백숲, 시원스런 전망-아름답고 호탕한 풍광에 끌려 한때엔 원근의 선비들이 여기에 별장을 두어 소요했고, 유경심, 장문보, 김용 같은 명류들도 여기서 살았다고 한다.
대수 서씨가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기는 근조선 명종때 함재 서해에서 비롯되는데, 한양 사는 함재가 안동의 고성 이씨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됨에서였다고 한다.
그 장인 되는 청풍군수 이고는 많은 재산의 한몫을 그 사위 함재에게 나누어 줌과 함께, 학업에 독실한 함재를 위하여 웅장한 규모의 서재를 지어 주었는데, 그 서재가 곧 보물 제475호로 보존 되는 소호헌이다.
함재는 퇴계 문하에서 배워, 학문이 깊고 행검이 있어 사우의 촉망이 두터웠으나, 약관 23세로 아깝게 꺾이고, 5도 감사에 5조판서를 역임한 그 아들 성이 태어난 데가 바로 여기 소호헌 내당 이다. 약봉의 맏아들 경우는 우의정, 다음 경수는 종친부전첨, 경빈은 현감, 경주는 선조의 사위로, 여 러 형제가 모두 현달했고, 약봉의 후손에서 문과급제가 무려 121명이나 쏟아졌으며, 3대 상신으로 종태, 명균, 지수가 있고, 3대 대제학으로 유신, 영보, 기순을 내고, 3대 학자로 명응, 호수, 유구 등을 냄으로 하여, 여기 소호리에서 터전을 닦은 경파 서씨는 나라에서도 가장 빼어난 명문 가운 데 하나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 숱한 인물에서 성을 포함 몇 분만이 여기 출신일뿐, 거의가 한양에서 생장했으며, 병 자호란뒤에 성의 셋째 아들 경빈만이 다시 고향 마을을 찾아 은둔해 있었고, 약봉의 5대손인 명 민이 의성군수로 부임하여 거칠어진 옛마을을 매만지기도 했으며, 이어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가 내탕금 8천량을 하사, 서국보를 내려보내서, 여기 옛터전을 지키며, 선조의 유적을 수호하게 했다 고 한다.
그렇듯 화려한 내력을 지닌 성의 후예가 전국에 약 5만이라고 하나, 여기 일직에는 약 50호, 그 중에서 옛마을 소호리를 지키는 후손은 겨우 열댓집이라고 한다. 유적으로, 입향조 서해의 서재인 소호헌이 있고, 서해의 아들 성이 태어난 태실, 그리고 소호헌 앞에 서해가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