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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

상세설명

자원 설명

신라 시조 혁거세를 근원으로 삼는 반남 박씨는 고려이래 벼슬로, 학문으로, 충의로 역사를 빛낸 명인을 연면히 배출, 8도 전역에 번성한 명족으로, 이곳 반남 박씨는 조선 성종때 충의위부사 직을 지낸 박숙이 비로소 안동땅에 입향했다.
그 무렵 박숙의 가계는 자못 쟁쟁했으니, 그의 아버지 병균이 홍주판관, 그 조부 규가 경상관찰 사, 증조부 은이 태종때 수문관대제학에 좌의정겸 판이조사로 금천부원군에 봉군되었고, 고조부 상충이 고려말 신진 유학파로, 경사, 역학에 밝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판 전교시사였다.
이 문중이 화려한 지체에도 불구하고 안동에 낙향하게 된데는 예사롭지 않은 곡절이 있었음을 전한다. 문헌으 로 전하는 바는 아니나, 입향조인 숙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겨우 여나믄 살에 그 고모부를 따 라 안동에 온 것이 세조때였다고 한다.
홍주판관을 지낸 병균이 그 부인과 함께 요절한 것은 세 조의 왕위찬탈에 관련된 것으로 그 후손들에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자라던 명문집 외동아들로서, 아무리 부모를 잃었다 한들 그 어린 나이로 혼자서 외로이 타관살이를 했어야 할 사연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증손 승임이 지음 묘갈명에는 갑자기 고아가 된 그 자녀들을 백숙부들이 나누어 길렀다고 했다.)
아무튼 숙은 안동에서 자라, 능성 구씨에 장가들어, 그 처가 마을 부근인 가구리(지금 와룡면 가 구리)에 자리잡아 살았다.
숙은 아들 3형제를 두어, 맏아들 침이 영천(현 영주) 무섬에, 셋째 형은 영천 귀내, 문정리에 자리잡았고, 둘째 진이 안동땅에 정착하여, 자손이 그대로 뿌리를 내렸다. 진은 번거로움을 피하여, 낙동강 굽이에 안겨, 풍광이 명미한 운곡, 감호, 미남에 터전을 열어, 강건너 운곡에 서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글과 산수를 즐겨 생애를 자적했는데, 이퇴계의 만사를 받았을만큼 사림에 인정되었고, 그 증손 중윤이 진사, 정윤이 임진왜란에 군사를 도운 공 으로 통정에 올랐으며, 현손 정, 위가 함께 학행으로 추중되었고, 5대손 종범이 문과급제로 돈녕 도정을 지냈다.
그 맏파, 끝파가 영주의 거족으로 발전한데 대하여, 여기 안동 감호의 반남 박씨는 그렇게 번성 한 편은 아니나, 꾸준히 문행을 이어서 가성을 유지해 왔다. (과한으로 영주, 안동에서 문과 14장, 진사 30여장이 났다.)
그 세거의 터전에는 중종무렵 진이 강학하던 은곡서당, 빈이 창설한 복천서당이 있었는데, 안동 호에 잠기게 되어 은곡서당은 송천동에 옮겼으며, (은곡서당은 지방문화재에 제 36호로 지정) 그 집들은 안동, 의성에 여러 군데로 흩어져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