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경서, 호는 백담. 겸의 아들. 삼한 삼중대왕 검교대장군 존유의 후손이다. 중종 21년~선조 19년. 부동 지내에 살았다. 이황의 문인으로, 명종 1년 사마시에 합격, 동 1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에 보임되고, 홍문관에 등용되고나서, 문신정시에 장원, 수찬.병조.좌랑을 거쳐, 명종 22년 사가독서했다. 이어 이조참의, 충청도관찰사, 대사간,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판을 지내고, 대사헌에 이르러, 병으로 사임했다.
선조 16년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고, 다시 대사헌, 부제학을 지냈다. 처음 이퇴계의 문에 나가 경서을 배우매, 스승 퇴계는 그의 문장과 행실을 칭찬했다. 척신 윤원형이 권세를 휘둘러 정사를 어지럽히매, 공이 홍문관에 있으면서, 과감히 앞장서서 그 죄를 논계하니, 동료들이 모두 놀래었다. 충청도관찰사에 부임하여, 한결같이 성과 신으로 임하여 다스림이 청간하매 치적이 있었다. 백성중에 형제끼리 서로 송사하는 자가 있어, 공이 도리로써 달래로, 간곡히 타이르매, 싸우던 형제가 함께 감동하여, 스스로 송사를 그치고, 드디어 서로 화목을 도타이 했다.
대사성에 있어서는 선비를 기름에 법도가 있고, 일깨움을 게을리하지 않아, 사풍이 새로워지고 성취하는 자가 많았다. 어느 대신이 임금께 아뢰기를 ′선비의 기풍이 떨치지 못했음은 지도하는 방법이 옳지 못했음인데, 이제 훌륭한 사표를 얻었으니, 오래 맡기어 교학의 기틀을 확고히 바로잡아 다지게함이 옳을 것이라′고 했다.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함이 극진하여, 혹 나라에 언잖은 일을 만나면 기색이 추연해지고, 식사를 제대로하지 못했다. 공은 매우 청렴하여, 요직에 있을 때, 혹 아는 지방 수령들이 물건을 보내와도 모두 물리쳤으며, 전라감사에서 돌아올때도 마치 가난한 선비의 나들이처럼 그 행장이 쓸쓸했다.
오래 중앙의 요직에 있으면서도 서울에 집을 갖지 않았고, 하도 검소하여, 살림살이는 늘 궁색한 지경이었다. 당시 동,서당쟁이 시작될 무렵이었으나, 공은 항상 중립을 지켰다. 효성이 도타와 부모상을 당하여는 무덤 앞에 집을 얽고 3년을 슬퍼했으며, 매양 기일이면 초상때처럼 슬퍼했다. 공은 기상이 웅위하고 재주가 뛰어나며, 시문에 능하여, 그때 사람들이 ′당우인물이요, 한송 문장이라′고 일컬었다. 그 사후에, 공이 만년 학도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던 자리에 학도묘를 세웠다. 시호는 문단. 이준이 묘명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