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太宗) 공정대왕(恭靖大王)의 어필인 ‘초선대(招仙臺)’ 세 글자와 대군(大君) 정효공(靖孝公) 유묵인 ‘연비어약(鳶飛魚躍) 용반호거(龍盤虎踞) 청풍명월(淸風明月) 시주자오(詩酒自娛) 수능지족(誰能知足) 위선최락(爲善最樂)’ 스물 네 글자를 봉안하기 위해 지은 어필각이다. 이곳에 봉안되었던 태종의 어필과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유묵은 [헌릉삼자첩발 부 대군정효공유묵발]이란 글로 서첩에 함께 실려 있는데,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영조31, 1755~순조31, 1831)이 순조19년(1819)에 지은 것이다. 또한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영조44, 1768~헌종10, 1844)은 순조29년(1829) “선원 후손 이용석(李龍錫)이 유묵첩을 가지고 와서 발문을 써다랄고 하였다” 기록하고 있다. 광산인 일일재(一一齋) 김시찬(金是瓚:영조40, 1764~순조31, 1831)도 같은 내용의 글을 써서 이 글씨들이 분명히 태종과 효령대군의 진적(眞蹟)임을 밝히고 있다. 어서각기(御書閣記)는 고계(古溪) 이휘령(李彙寧:정조12, 1788~철종12, 1861)이 지었고, 어필각기는 장사랑 경기전 참봉 허훈(許薰)이 지었다. 어서각 이건기는 1907년에 가선대부 청송군수 안종덕(安鍾悳)이 지었다. 어필과 유묵은 선조25년(1592)에 정효공의 5세손 제안(齊顔)이 두 첩(帖)을 안고 영남으로 피난하여 옴으로부터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된다. 다시 13세손인 용석(龍錫)에 이르러 안동부(安東府) 예안현(禮安縣) 대계(大溪)가 행정(杏亭) 동쪽에 터를 잡아 집 몇 칸을 지어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였다. 이 일을 완성한 사람은 그의 손자인 병두(柄斗)였다. 다시 어필각을 1906년에 병두의 손자 기화(起華)가 구룡리(九龍里)로 이건하였다. 당시 정효공의 18세 사손(祀孫) 강준(康準)이 선성현감을 맡았고 세종대왕 19세손 재기(載紀)가 안동부사로 있었기 때문에 일꾼을 징발해 재목을 운반하여 이듬해인 1907년에 일을 마쳤다. 필자인 경기전 참봉 허훈에게 기문을 청한 사람은 정효공 15세손 해우(海宇)였다.
이씨문중
목조와가
조선중기
태종(太宗:공민왕16, 1367-세종4, 1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