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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상세설명

자원 설명

  • (光海때 睡隱 李弘祚 入鄕)

退溪學脈의 巨峰 大山형제에 이어 學行선비 輩出한 漢山 李氏의 世居의 터전 소호리는 지금 행정구역으로 一直面 望湖洞 암벽으로 병풍을 두른 大多山 남쪽 기슭을 배경으로 앞으로는 광활한 들녘 한복판을 멀리 黃鶴山에서 근원하여 義城 玉山을 거쳐 八十리를 누벼 내린 이름도 예쁜 眉川 살찐 냇물이 마을을 안아 굽이치고 들녘 저편엔 서남에 烏山, 동남에 香爐峰의 수려한 연맥이 그림처럼 에워 둘러 江山이 빼어난 安東에서도 소호리는 風光이 명미하기로 일컫는 마을이다.
永嘉誌에는 "縣東八里 山璟水抱 如龜蛇聚會 故曰龜尾 有內龜尾村 安望村 蘇湖村 星南村 魯厓村 龜川村 自古名家多有 形勝甲於一縣" 이라 하여 곧 一直縣 동쪽8리 산과 물이 서로 안고 휘감아 흡사 거북과 뱀이 모인 형상이어서 귀미(龜尾)라고 일컫는다 했는데, 귀미에는 안귀미. 안망실. 소호촌. 성남촌. 노애촌. 귀천촌 등 몇 개의 마을이 있다고 했으며 예로부터 이름난 가문이 많았고 그 형승이 고을(一直縣)에서 제일이라고 했다.
그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소호마을은 맑은 湖水가 있고 울창한 숲 속에 싸여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선비들 이 여기에 別業을 두어 소요(逍遙)했다고 전하거니와 일찍 김학봉(金鶴峰)의 조카 운천(雲川)도 여기서 살았고 조선 明宗무렵에 정착한 당성서씨(達城徐氏)는 지금도 귀천(龜川)을 사이에 둔 음지 마을에 세거해 오며 그 양지편 마을이 바로 3백년 전에 정착한 한산이씨의 터전이다.
한산이씨가 여기에 전거(奠居)하기는 광해군(光海君)때인 수은 이홍조(睡隱 李弘祚)로 비롯되는데 한산이씨는 수은의 11代祖인 가정 이곡(稼亭 李穀)이 儒學의 거벽(巨擘)으로 元나라 과거에 급제 거기서 벼슬을 지내다가 귀국하여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냈으며 元의 황제에 건의하여 고려의 처녀를 뽑아 가는 악폐를 없앴고 詩文의 大家로 죽부인전(竹夫人 )을 짓기도 했으며 그 아들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14세에 進士에 오르고 역시 元나라 과거에 장원하여 거기서 벼슬하다가 귀국 여러 요직을 지내면서 다난한 국사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쇠퇴해진 儒學을 진흥시킴에 크게 공헌, 문장으로 一世를 울리고 절의(節義)로 우러름을 모아 저 정포은(鄭圃隱), 길야은(吉冶隱)과 더불어 려말삼은(麗末三隱)의 한 분으로 너무도 이름이 높거니와 그 아들 종학(種學), 종덕(種德), 종선(種善)이, 모두 高麗에 급제하고 높은 벼슬을 지내다가 고려왕실을 위해 순절(殉節)했고 종덕의 아들 맹진(孟畛)이 世宗때 우찬성(左贊成)을 역임, 詩文으로 울렸으며 그 중손 윤번(允蕃)이 대사간(大司諫)을 지내는등 漢山李氏는 소호리파의 직계 先世만으로도 명망 높은 인물이 하도 많다.
光海때 大北이 나라를 휘저어 세상이 몹시 어지러워질 때 출세의 뜻을 버린 수은(睡隱)이 安東에 집을 부리게 된 것은 그가 바로 西厓 柳成龍의 외손자이기 때문이다. 안동에 정착한 수은은 향로봉(香爐峰)아래 서당을 짓고 서책을 벗하여 산수(山水)에 자적하다가 병자호란에 의병장에 추대되었고 현감을 지냈으며 그 현손 대산(大山)이 밀암 이재(密庵 李栽)의 문인으로 학문을 크게 이루어 사마시(司馬試)와 文科를 거쳐 예조, 형조의 참의(參議)를 지내고 향리 大多山 아래 大山書堂에서 한결같이 탐구에 정진하면서 많은 후진을 길러 퇴계의 학통을 이은 조선후기 유학의 거성이였으며, 그 아우 소산(小山)이 또한 학문으로 영남에 울렸고, 현정(顯靖)이 進士, 文科로 校理를 지냈다. 大山의 아들 완이 또한 일대의 학자로 正祖때 文科를 거쳐 校理를 지냈으며 小山의 아들 우가 또한 家學을 이은 학자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신원(伸寃)을 청하는 영남선비들의 만인소(萬人疏)의 소수(疎首)에 추대되기도 했고, 大山의 손자 병원(秉遠)이 학행의 선비로 주부(主簿)를 지내고 性理통동를 지었으며 병운(秉運)이 순조(純祖)때 현감을 지내면서 청백으로 이름이 있었고 大山의 현손 돈우(敦禹)는 고종때 참판을 지냈는데 이들은 학문에 깊고 글을 잘하여 모두 문집을 남겼다.
안동에서 대구를 통하는 국도를 따라 三十리 학행 높은 인물을 많이 낸 이 마을은 수은(睡隱)과 대산의 종택을 비롯하여 수은의 유적인 수옥정(漱玉亭), 小山이 강학하던 귀천서당(龜川書堂)이 있고 물건너 오산(烏山) 아래엔 목은과 수은을 제사하는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있으며 또 소호리에서 서쪽으로 약 五里에 大山이 만년 강학하던 고산서당(高山書堂)자리에는 大山을 제사하는 고산서원(高山書院)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