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지-안동의 인물 - 문화유산 - 안동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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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학문과 예의를 숭상했던 유교문화의 맥! 민속문화의 보고!!

안동의 인물

안동의 인물

하위지

분류 :
문화 > 인물
상세설명

자원설명

하위지 공은 사람됨이 침정 과묵하고 공손하며 예의가 있어 대궐앞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록 비가 와서 질더라고 길을 피하지 않았다. 공의 자는 천장, 중장, 호는 단계·연풍이요, 본관은 진주이다.
1387년(우왕 13) 담의 아들로 태어났다. 1435년(세종 17) 생원에 합격, 1438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호당에 들어가 독서하고 1444년 집현전 교리가 되어 오예의주 상정에 참여했다. 집현전에서 경연에 왕을 모시면서 학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일찍이 세종때 왕명으로 역대병요의 편집에 착수했는데 세조가 당시 수양대군으로 이를 총재하게 했다. 그 책이 1453년(단종 1) 봄에 간행되니 공로가 많은 사람에게 가자하게 되었다. 공은 당 시집으로 중직에 승진되었으나, 이를 굳이 사퇴하면서 임금의 나이가 어려서 나라가 위태로운데 왕족이 작상을 가지고 조신을 농락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1453년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공은 벼슬을 버리고 선산에 물러가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단종에 청하여 좌사간으로 불렀으나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455년(단종 3, 세조 1) 세조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고 공을 예조 참판으로 불러 마지못해 취임 하였으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 하면서 별실에 쌓아 두었다.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동모자 김질의 고변으로 적발되어 1·2사회에 걸려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응부, 류성원과 함께 순절하니 이를 사육신이라 한다. 세조는 공의 재주를 아끼고 몰래 그를 대하고 모의한 사실을 고백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회유하였으나 공은 일소에 부쳤다. 두 아들 호와 박도 연좌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다. 작은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을 두려워함이 없이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이미 살해되었는데 제가 어찌 혼자 살아남겠습니까」하고 태연히 죽음을 받으니 그 아버지에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라 칭찬했다. 공이 옥중에 있을 때 종자국에게 후사를 부탁하니 국은 나이 어렸으므로 죽음을 면했다. 이름을 원이라 고쳤고 안동에서 살았다.
1705년(숙종 31) 민진후가 그 일을 임금께 아뢰어 원으로 공의 후사를 잇게 하였다. 회재와 퇴계의 사어록에 「동방의 절의와 도학의 전함이 포은 이후로 하위지, 박팽년 두 분이 첫머리가 된다」하였다.
1774년(영조 20) 이조판서가 증직되고 충렬공의 시호가 내렸다.
1776년(정조 1)에 정려를 내렸고 유림들은 영월 창절사 , 과천 민절사, 선산 월암서원, 홍천 녹운서원, 대구 낙빈서원, 의성 충렬사에 봉향하고 충신단에 배향했다. 지금 안동군 서후면 교동에 공을 모시는 창열서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