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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학문과 예의를 숭상했던 유교문화의 맥! 민속문화의 보고!!

안동의 인물

안동의 인물

이해

분류 :
문화 > 인물
상세설명

자원설명

공은 덕성이 관후(寬厚)하며 기량(器量)이 회홍(恢弘)하였고 형제간에 우애(友愛)하여 가정이 화락(和樂)하였다.
자제(子弟)와 비복(婢僕)이 허물이 있어도 표면에 들어내어 꾸짖지 않았다.
중형(仲兄)이 조졸(早卒)하니 공이 조카 재(宰)를 데리고 와서 성립(成立)할 때까지 무애(撫愛) 교훈(敎訓)하였다.
공은 사람과 같이 생활하는데 지란(芝蘭)의 향훈(香薰)에 젖는 듯하여 자연히 대인 관계가 친밀하였다. 친구의 급함을 보면 반드시 극력 구제하며 평생 사람을 해(害)할 마음이 없으니 길인 군자(吉人 君子)임을 알 수 있다.
공은 이조 명종 때 문신(文臣)으로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요 시호는 정민공(貞愍公),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1496년(연산군 2) 진사 식(埴)의 아들이며 문순공(文純公) 황(滉)으로 도산면 온계(溫溪: 現 溫惠)리에서 태어났다.
1525년(중종 20) 진사(進士)가 되고 1528년 33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533년 사간(司諫)·정언(正言)등을 거쳐 1541년 직제학(直提學)에 올랐으며, 이어서 경상도 진휼경차관(賑恤敬差官)·도승지(都承旨)등을 역임했다.
1544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대사헌·대사간·예조참판(禮曺參判)을 지내고 이해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仁宗)초에 공은 대사헌으로 우의정(右議政) "이기"를 탄핵하여 파면시킨 까닭에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고 이기의 심복인 사간(司諫) 이무강(李無彊)에 의해 구수담(具壽聃)의 무리로 몰려 사태가 매우 위급했다. 그때 주의 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했으나 끝내 거절했는데 명종은 그의 결백을 짐작하고 특히 갑산(甲山)에 귀양 보내는 것으로 그쳤으나 가는 도중 양주(楊州)에서 1550년 54세에 병사했다. 김안로(金安老)와 이웃에서 살았으므로 안로가 권세로 공을 이끌려 했으나 끝내 거절했다. 공이 몰(歿)한지 수년 후에 이기는 우울증으로 죽었고 무강이 또한 찬배(竄配)되어 죽었다.
공은 예서(禮書)에도 능했으며 퇴도(退陶) 선생의 형으로서 소시(少時)부터 뜻이 같고 도(道)가 합하여 당세의 사람들이 금옥(今玉) 곤계(昆季)라 불렀다. 공이 서울에서 사관(仕官)할 때에 퇴도(退陶)와 청산시(靑山時)로 상약(相約)한 일이 있는데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위(位)가 2품에 이르렀으니 초야(草野)의 사람으로 영화(榮華)로우나 나는 즐겁지 않도다」하였으니 그의 심오(深奧)한 뜻을 가히 알 수 있겠다.
선조 때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영주의 삼봉서원(三峰書院)과 예안(禮安)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봉향(奉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