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안동의 인물 - 문화유산 - 안동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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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학문과 예의를 숭상했던 유교문화의 맥! 민속문화의 보고!!

안동의 인물

안동의 인물

이황

한자명
李滉
분류 :
문화 > 인물
상세설명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李滉 : 1501~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김씨는 잠, 하,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 의, 해, 증, 황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막내이다.

  • 이황 기타사진

형태/방법/업적

12세 때 숙부 이우(李)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박사(博士)·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1539년 수찬(修撰)·정언(正言)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15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人)으로 문학(文學)·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1552년 대사성에 재임, 1554년 형조·병조의 참의에 이어 15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1568년(선조 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주변 관광자원

도산서원, 퇴계퇴실, 퇴계종택, 묘소

관련 인물 및 유적

  • 시사단 : 도산서원의 맞은편에 안동호를 배경으로 떠 있는 이곳은1792년 정조임금이 퇴계선생 학덕을 기리고자 어명으로 특별과거인 ′도산별시′를 치르게 해 ′시사단′이라 부른다.

  • 상덕사 : 매년 음력 2, 8월에 도산서원 내 ′상덕사′에서 춘추향사를 지낸다.

  • 도산별시 : 이황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안동민속축제 기간에 도산서원에서 ′도산별시′를 치른다.

  • 계상서당 : 만년에 퇴계 선생은 은퇴하여 종가 건너편에 조그만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많은 제자들이 입문하여 장소가 협소해지자 후에 도산서당으로 옮겼다 한다. 율곡 이이가 23세 때 당시 58세의 퇴계 이황을 만나서 3일간 머무르며, 학문과 시를 논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위치 설명

안동에서 봉화방면의 국도 35호선을 타고 40분 가량 소요 (30km 정도 거리)

교통편

안동시외버스터미널 옆에서 67번 시내버스로 50분 가량 소요

부가정보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해당자원 전문가 및 연락처
도산서원 관리사무소 054-856-10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