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섭-안동의 인물 - 문화유산 - 안동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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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학문과 예의를 숭상했던 유교문화의 맥! 민속문화의 보고!!

안동의 인물

안동의 인물

김지섭

분류 :
문화 > 인물
상세설명

자원설명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위경(衛卿). 호는 추강(秋岡). 출신지는 풍북면(豊北面) 오미동(五美洞 : 현 풍산읍 오미리). 김지섭은 1905년 상주보통학교(尙州普通學校) 교원에 이어, 금산지방법원(錦山地方法院) 서기 겸 통역관으로 재직하였으며, 1908년 설립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참여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20년 중국 상해로 망명한 김지섭은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1922년 서울로 잠입하여 유석현(柳錫鉉)·윤병구(尹炳球)와 독립운동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1922년 12월 조선총독부 판사 백윤화(白潤和)에게 독립운동자금 5만원을 요청하고 최후 통첩을 보냈다가 실패하였다. 이어서 의열단 단원이었던 김시현·유석현 등과 함께 1923년 3월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할 목적으로 폭탄 36개를 상해로부터 국내로 반입하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에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김시현을 비롯한 단원 13명이 검거됨으로써 또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체포를 면한 김지섭은 상해로 탈출하였다.
1923년 9월 1일 동경을 중심으로 대지진이 일어나자, 한인 대학살이 자행되어 1만 여명에 가까운 한인이 죽음을 당했다. 김지섭은 그 원수를 갚기 위해 동경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질 계획을 세우고, 1923년 12월 21일 폭탄3개를 갖고 일본으로 갔다. 열흘 뒤 12월 31일 일본에 도착한 그는 의회가 휴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 왕궁으로 대상을 바구었다. 1924년 1월 5일 왕궁 정문으로 접근하다가 경찰이 다가서자 폭탄을 던졌고, 급히 피하면서 왕궁으로 들어가는 다리인 니주바시에 다시 폭탄을 던졌으나, 불행하게도 모두 폭발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체포된 김지섭은 1925년 5월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1927년 20년으로 감형되었지만, 다음해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