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호서원-향교/서원/서당/재사 - 문화유산 - 안동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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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학문과 예의를 숭상했던 유교문화의 맥! 민속문화의 보고!!

향교/서원/서당/재사

명호서원

주소
안동시 옹정골길 56
상세설명

자원설명

명호서원은 1790년(정조14)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원과 이주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 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처음에는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의 자미산 아래에 있었고
서원명도 명계서원이라 불렀다. 그 후 1837년(헌종3)에 정상동으로 이전하여 명호서원이라 개 칭하였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묘우인 경의사를 비롯하여 명륜당, 동재, 서재, 신문, 전사청, 주소 등이 있었다고 한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으나, 매년 9월 중정에 설단으로 향사를 올리고 있다. 이원(1368~1429) 선생은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고성이요, 자는 차산이며, 호 는 용헌이다. 고려때 수문하시중이었던 암의 손자이며, 밀직부사 강의 아들이다. 포은 정몽 주 선생의 문인으로 1382년(우왕8)에 진사가 되고, 138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복시승을 거쳐 예조좌랑과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지평이 되었고, 1400년(정종2) 좌승지로 있을 때 방원이 그의 동복형인 방간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1)에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되었다. 그 해 철성군에 봉작되었고, 같은 해에 공안부소윤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 다. 이듬해 경기좌우도관찰출척사가 되었고, 1403년에 승추부제학으로 있으면서 병마도절제 사를 겸하였다. 1406년에 참지의정부사와 판의용순금사사로 겸직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판한 성부윤을 거쳐, 1408년에 태조가 죽자 국장을 주관하는 빈전도 감판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경상도관찰사로 영상주목사를 겸직하였다. 이 해에 철성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1414년 영길도도순문사를 거쳐, 이듬해 6월에 예조판 서로 있다가 12월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참찬을 거쳐 1416년 3월에 판한성부사, 5월에 병 조판서가 되었다. 1417년 판우군도총제와 찬성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에 올랐다
1419년(세종 1) 영경연사를 겸하였고, 1421년 1월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12월에 좌의정으 로 승진되었고, 우의정 정탁과 함께 도성수축도감도제조가 되어 8도의 정부 32만 5,000여명 을 징발, 1422년 1월부터 두 달에 걸쳐 그때까지 토성으로 있던 도성 성곽을 석성으로 개축 하였다. 1425년에 등극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저서로는 <<용헌집>>, <<철성연방집 >>이 있으며, 시호는 양헌이다. 이주(?~1504)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주지요, 호는 망헌이며 좌의정 원의 증손 으로, 현감 평의 아들이다. 선생은 김종직 선생의 문인으로 1488년(성종19) 별시에 을과로 급제하 여 검 열을 거쳐 정언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때 김종직 선생의 문인으로 몰려 진도로 귀양갔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전에 궐내에 대간청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이 있다는 이유 로 김굉필 선생 등과 함께 사형되었다. 성품이 어질며 글을 잘하였고, 시에는 성장의 품격이 있었으며, 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직언으로 유명하였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