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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유적지

원사암

주소
녹전면 녹전로 752-21 (신평리 751)
상세설명
  • 분 류 : 가옥
  • 지 정 :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28호
  • 지정일 : 2001. 11. 1
  • 소재지 : 안동시 녹전면 신평리 751
  • 관리자 : 의성김씨평장공파삼대문중

원사암은 김자강(金自江)·완(琬)·영균(永均) 3대의 묘소를 수호하고 묘제를 지내기 위한 재실이다.
이 건물은 원래 김자강의 7세손 유음(1607∼1680)이 자강의 어머니인 안동 권씨의 묘하에 재사(齋舍)로 창건하여 '사암(思庵)'이라고 했다가, 아들인 만휴(1625∼1694)가 1685년경에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원사암'이라고 고쳐 불렀으며, 현재 그가 지은 「이건상량문(移建上樑文)」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원사암은 녹전면 소재지를 지나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바라보이는 골짜기 깊숙한 곳에 위치하여 남향으로 앉아 있다. 앞쪽에는 대문간채와 좌·우익사가 연이어져 뒤쪽 마당을 감싸안으며, U자형을 이룬 부속채가 자리잡고 그 뒤편에 一자형의 몸채가 1칸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전체적으로 ′튼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현재 원사암에 걸려있는 중건기 현판에 '상지이년 을축(上之二年 乙丑)'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 고종 2년(1865)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운데칸을 강조한 3칸 대청 배면의 개구부 구성기법과 굵은 둥근기둥에 무익공을 장식하여 몸채의 격을 높인 양식수법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또한 대청 배면 영쌍창은 17세기 이전에 주로 찾아볼 수 있는 창호형식으로, 영이 필요에 따라 빼낼 수 있는 착탈식인 점은 보기 드문 예이다.
원사암은 조선 전기 인물인 의성김씨(義成金氏) 김자강(金自江)·완(琬)·영균(永均) 3대의 묘제(墓祭)를 지내기 위한 재사 건축물이다. 집안에 전해지기로는 원래 김자강의 7세손 유음(有音, 1607∼1680)이 자강의 모(母) 안동 권씨의 묘하(墓下) 재사(齋舍)로 창건하여 사암(思庵)이라고 했다가, 아들인 만휴(萬烋, 1625∼1694)가 1685년경에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원사암(遠思庵)이라고 고쳐 불렀으며, 현재 그가 찬한 「이건상량문(移建上樑文)」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현재 원사암에 걸려있는 중건기(重建記) 현판에는 중건 시기와 관련하여 '상지이년 을축(上之二年 乙丑)'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1865년(고종 2)에 중건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녹전면 소재지를 지나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바라보이는 골짜기 깊숙한 곳에 배산하여 남향으로 앉아 있다. 앞쪽에는 대문간채와 좌·우익사가 연이어져 뒤쪽 마당을 감싸안으며 U자형을 이룬 부속채가 자리 잡고 그 뒤편에 一자형의 몸채가 1칸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전체적으로 '튼□자형'을 이루고 있다. 전저후고(前低後高)의 대지의 지형에 따라 다층 기단을 쌓고 부속채는 대문채보다 좌·우익사를 약간 높게 하여 서산각지붕으로 꾸미고 몸채는 부속채보다 지붕 키만큼 더 높게 앉혔다. 몸채와 부속채 사이의 트인 부분에는 블록 담장을 시설해 막았다. 묘소는 재실에서 30여m 정도 떨어진 좌측편 야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몸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중앙의 3칸 대청이 마당폭을 가득 메우고 그 좌·우측에 제관방과 유사방이 각기 1칸씩 자리잡고 있다. 3칸 대청의 전면은 개방하고 배면의 중앙에는 띠장널 영쌍창을, 좌·우측칸에는 각각 외짝 띠장널문을 달았다. 3칸의 간살이 같은 경우 동일한 두짝 창을 다는 일반적인 모습과 달리 이 재사는 좌·우측칸에 외짝 창을 달아 다소 폐쇄적으로 중앙칸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이는 지금은 철거되고 흔적만 남아 있는 중앙칸 뒤편 벽감의 상징성을 더해 주기 위함이라 여겨진다. 영쌍창의 영은 단면 나비를 창틀 두께보다 짧게 하여 가운데 설주를 창틀 바깥쪽면에 맞추어 세웠다. 이 영은 필요에 따라 빼낼 수 있는 보기 드문 착탈식이다. 영쌍창은 17세기 이전에서 주로 찾아 볼 수 있는 오래된 창호형식 중의 하나이다. 이런 3칸 대청 배면의 개구부는 어칸의 벽감만 없어졌을 뿐 나머지는 이건(1685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관방과 유사방이 있는 좌·우측칸은 약 40년 전 중수 때 전부 신재로 개체하여 산뜻하다. 이들 두 방과 대청 사이의 개구부에는 19세기 이후에 주로 나타나고 있는 쌍여닫이 굽널띠살 문이 좌·우 대칭으로 시설되어 있다. 막돌 허튼층 쌓기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대청의 정·배면에 각기 두개씩 굵은 원주를 세워 어칸의 위계를 높이고 나머지는 방주를 세웠다. 3칸 대청 정·배면은 무익공계로, 좌·우 퇴칸은 민도리로 장식했다. 기둥 상부에는 무익공이 끼워져 있고 그 상부에 놓인 주두 위에는 행공이 얹혀 있다. 기둥 사이의 창방 위에 소로 하나를 끼운 방형화반을 세워 주심도리 장혀를 받게 했다. 대청 상부 가구는 5량가로 대들보 위에는 동자주가 종보와 중도리를 받고 있으며, 종보 위에는 제형판대공이 종도리를 지지하고 있다.
대문채는 정면 5칸으로 좌측 두 번째 칸에 대문을 내고 그 왼쪽에는 하인방 1칸을, 오른쪽으로는 외양간 1칸과 부엌 2칸을 두었다. 하인방 뒤쪽에는 온돌방 1칸과 전사청 1칸이, 2칸 부엌의 우측칸 뒤편에는 주사방 2칸이 연이어져 각기 좌·우익사를 이루고 있다. 전사청은 판벽을 두른 마루방으로 앞쪽에 두 짝 띠장널문을 달고 그 좌측방에서도 드나들 수 있게 문을 내었으며, 외양간 상부에는 대문간에서 이용하는 수장고를 마련했다.
막돌 허튼층 쌓기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모두 방주를 세운 간결한 3량가의 민도리 집으로, 홑처마에 서산각 지붕을 얹었다.
어칸을 강조한 3칸 대청 배면의 개구부 구성기법과 굵은 원주에 무익공을 장식하여 몸채의 격을 높인 양식 수법 등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또한 대청 배면의 영쌍창은 건축양식 편년에 주요 대상이 되고 있는 창호 형식으로 원래의 모습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영이 흔치 않은 착탈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