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지 및 책판-전적/유물 - 문화유산 - 안동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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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유물

영가지 및 책판

주소
길안면 송사리 206
상세설명
  • 분 류 : 문서
  • 지 정 : 경상북도유형문화재 224호(1986. 12. 11)
  • 시 대 : 조선시대
  • 소재지 : 안동시 길안면 송사리 206

이 자료는 안동 지역의 지방지인 「영가지(永嘉誌)」 및 이의 책판(冊板)이다. 永嘉는 화산(花山)과 함께 전근대 사회에서 안동의 별칭으로 많이 불려진 이름이다. 「영가지(永嘉誌)」의 편찬은 1602년(선조 35) 권기(權紀)가 그의 스승 류성룡(柳成龍1542∼1607)으로부터 편찬 요목을 받아 동향인 권행가(權行可)와 함께 편찬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함주지」(咸州誌)의 편차(編次)를 참고하는 한편 그것을 다시 류성룡에게 질의한 다음 동향의 사우(士友)들과 함께 분담 집필케 하였으나, 류성룡이 죽자 중단되고 말았다. 그후 함안(咸安)의 읍지(邑誌)인 「함주지」(咸州誌)를 편찬한 바 있던 정구(鄭逑1543∼1620)가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권기·김득연·권오·이혁·배득인·이적·유우잠·이의준·권극명·김근·손완( 등 10명을 부청으로 소집하여 재편찬에 들어가 1608년(선조 41)에 완성되었다.
이때 편찬된 「영가지」(永嘉誌)의 초본(草本)이 부사(府司)에 소장된 채 유전(流傳)해오다가 1760년(영조 36) 서울 찬수청(纂修廳)에 바쳐졌고, 2년 후에 서울에 올려진 것을 등초(謄草)하여 다시 부사(府司)에 비치하였다. 그 후 1784년(정조 8) 호장 권창실(에 의해 개장(改粧)되었는데, 그 당시 등초해온 「영가지」(永嘉誌) 사본(寫本)은 18세기말부터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초고본(草稿本) 1책, 초고본(草稿本) 8권 3책, 정고본(定稿本) 8권 4책 등이 현존하고 있다.
목판본은 1839년(헌종 5) 권상학·권상택(權相鶴·權相宅) 등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이는목판 99매 188장(木板 99枚 188張) 으로 된 것으로 크기는 가로 52.2cm, 세로 21.1cm이다. 이 목판본의 규격은 전광(全匡) 32.0cm×22.0cm, 전광(半匡) 21.0cm×17.6cm로 4책이다.
이러한 「영가지」(永嘉誌)는 전국 읍지 가운데 편찬 시기가 매우 빠른 17세기초인데다가 류성룡(柳成龍)과 정구(鄭逑)의 지휘하에 권기(權紀)를 비롯한 당시 안동부를 대표하는 유림들이 두루 편찬에 참여했기 때문에 체제가 정연하고 내용이 가장 충실하였다. 따라서 이들 자료는 전국 읍지의 모범이 될 뿐 아니라 지방사 연구자료로서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