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렬서원-향교/서원/서당/재사 - 문화유산 - 안동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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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학문과 예의를 숭상했던 유교문화의 맥! 민속문화의 보고!!

향교/서원/서당/재사

창렬서원

주소
안동시 서후면 교리새마을길 73
상세설명

자원설명

창열서원은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단계 하위지 선생의 학문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 하였다. 1804(순조 4)년에 창열사를 지어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1809년(순조 9)에 안동 시 서후면 송야리에 창건하였다.
그 뒤 사림의 중의로 안동시 서후면 이개리로 이건해서 춘 추향을 받들어오다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89년에 사림과 후 손들에 의해 현 위치에 복설되어 매년 음력 9월 2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창열사, 4칸의 숭열당, 3칸의 성안재, 2칸의 전사청, 3칸의 신문, 3 칸의 유의문 등이 있다. 사당인 창열사에는 단계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강당인 숭열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3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된다. 성인재는 기숙사로 향사 및 원내의 행사시에 제관과 유림들이 기거한다. 신문은 사당의 대문으로 향 사시 제관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며, 유의문은 서원의 대문이다. 하위지(1412~1456) 선생은 군수 담의 아들로 자가 천장, 중장이며 선산 출신을로 본관은 진 주이다. 어릴때부터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강지와 함께 학문에 전짐하였다 한다. 1453년(세종 17)에 생원이 되고, 1438년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자 세종이 약을 내려 고향에 가서 치료하게 하고, 경상감사에게도 전지하여 그의 구료를 하게 하였다. 1444년 집현전 부교리가 되어 <<오례의주>>의 상정에 참여하였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강지가 모함을 당하여 전라 감옥에 갇혀 병이 위독하자 관직을 사임 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형의 병을 간호하였다. 그 뒤 1448년 집현전 교리로 복직되고, 이듬해 춘 추관의 사관으로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때부터 왕을 보좌하여 훌륭한 치적을 쌓은 관계로 문종이 즉위하자 장령에 임명되었다. 선생의 강직한 기개는 이 때부터 펴져지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대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함이 없이 직언을 꺼리지 않았다. 한때, 대신들의 실정을 적극 공격하다가 왕과 대신들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 과 정창손 선생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하였다. 1453년 (단종 1) 장령에서 집의로 승진하였 다. 이해에 문종때 <<역대병요>>와 병서의 수찬에 참여하였던 집현전 학사를 수양대군이 앞장서서 가 자시킬 것을 논계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선생은 서적의 수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 므로 하등 가자될 이유가 없음을 들어 자신이 가자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 서서 처리하는데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이므로 경 솔히 시행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고, 따라서 종신의 신분으로 사은을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 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선생은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하여 집현 전 직제학에 전보되었다. 그러자 사직을 한 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경상도 영산의 온정 에 내려갔다. 그 뒤 1454년 집현전 부제학으로 다시 복직되자 대궐 옆에 있는 불당이 왕실에 이롭지 못 함을 들어 이를 훼철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이해에 <<세종실록>>을 편찬하는데 편수관으로 참여 하였고, 경연에서 시강관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 이듬해 집현전 부제학에서 예조참 판에 승진되었으며, 곧이어 세자우부빈객을 겸하게 되었다. 세조의 즉위후 선생에게 교서를 내리 는 등 잇단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본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 하는 일에 있었기 때문에 세조의 녹을 먹는 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 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를 않았다 한다. 한편으로는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즉, 세조가 즉위하자 왕권강화책으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본래의 권한인 서사제를 폐지시 키고 육조의 관장사무를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왕에게 상계하는 육조직계제를 시행하여 의 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 서사제의 부활 을 강력히 주장하였던 것이다. 1456(세조 2)년에 사예 김질의 고변으로 단종복위 운동이 탄 로나 선생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국문을 받게 되었다.

선생은 국문을 받으면서 세조에게 이르기를 "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하면 될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 요"하 였다. 선생은 국문과정에서 성삼문 선생등이 당한 작형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 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을 당하였다. 선생이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와 박도 연좌 되어 사형을 받았다. 작은 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이 없었다 한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하여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 되셨으니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갈 누이동생은 비 록 천비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한다. 뒤에 남 효온 선생은 <<추강집>>의 <육신전>에서 선생의 인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한 바가 있 다. "그 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였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 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 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하여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한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 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하여졌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 로 삼게 된다"고 평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 영월의 창절사, 선산의 월암서원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