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도선생 필법-전적/유물 - 문화유산 - 안동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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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유물

퇴도선생 필법

주소
서후면 교리향교길 45-18 (교리 207)
상세설명
  • 분 류 : 문서
  • 지 정 : 보물 548호 (1971. 8. 30)
  • 시 대 : 조선시대
  • 소재지 : 안동시 서후면 교리리 207

이 자료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이 그의 제자인 권호문(權好文 1532∼1587)에게 글씨를 가르치기 위하여 체본(體本)으로 써 준 것이다. 이황는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로, 1527년(중종 2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1534년(중종 29) 식년시(式年試)에서 을과(乙科) 1인으로 급제하였고,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에 임명된 이래 사환(仕宦)과 은퇴를 번갈아 하면서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성균관 사성(成均館 司成)·풍기군수(豊基郡守)·대사성(大司成)·공조참판(工曹參判)·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성리학의 주리설(主理說)을 대성하여 ′동방(東方)의 주자(朱子)′라고 불린 대학자였고, 주자의 설을 계승하여 이를 심화시켜 체험주의(體驗主義)·수양주의(修養主義)의 입장을 내세웠었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文純′이라는 시호와 함께 문묘에 배향되어 후세인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추모되었다. 또 그를 봉사하는 서원은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이며, 저서로는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심경후론(心經後論)′·′성학십도(聖學十圖)′·′퇴계집(退溪集)′
등이 있다.
권호문(權好文)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중(章中), 호는 송암(松巖)으로 1561년(명종 16)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이후 仕宦을 단념하고 고향인 청성산(靑城山) 아래에 무민재(無閔齋)라는 서재를 짓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학덕이 높아 많은 학자들이 따랐는데, 후일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내시교관(內侍敎官) 등에 임명되어 징소(徵召)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청성서원(靑城書院)에 배향되었고, 저술로는 시가(詩歌) 및 시조(時調)인 [독락팔곡(獨樂八曲)]·[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 등이 있고, 후일 그의 저술들은 ′송암집(松巖集)′, 원집(元集) 3권, 속집(續集) 6권으로 간행되었다.
크기는 가로 33.5cm, 세로 57.5cm로 모두 21장으로 되어 있으며, 이에 수록된 글자는 大·中·小字 등 크고 작은 체와 해(楷)·행(行)·초(草)의 각체(各體)를 따로 구별하여 썼다.
이는 해서(楷書) 13엽(葉), 행서(行書) 14葉, 소해(小楷) 6면(面), 소초(小草) 4面, 중자초서(中子草書) 2面이며, 그 외 行書 3行이 있으나, 이의 다음 부분 2장(張)이 떨어져 나가고 끝에 또 소해(小楷) 1엽(葉)이 있다.
그리고 맨 뒷장에 "낙인구서첩(洛人求書帖)"이란 제하(題下)에 당시 9행이 있으나 이것은 퇴계의 글씨가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
또 ′퇴계선생유첩(退溪先生遺帖)′은 2책으로 이황이 권호문에게 보낸 8통의 편지를 모은 것인데, 크기는 가로 26.2cm, 세로 40.3cm이다.
현재 이황의 글씨는 비교적 많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중에는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여장자수지서병(與長子受之書屛)"과 같은 대작이 있다. 그렇지만 이 자료에는 글씨의 각체(各體)가 구비(具備)되었을 뿐만 아니라 체본(體本)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이황이 성의를 다하여 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