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사의 무덤-민요/구비문학/민속놀이 - 문화유산 - 안동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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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학문과 예의를 숭상했던 유교문화의 맥! 민속문화의 보고!!

민요/구비문학/민속놀이

사진없음

홍진사의 무덤

상세설명

자원설명

때는 이조 중엽 안동시 풍천면 신성동 속칭 납성계에 살던 홍진사 집에는 아들 3형제가 있었다.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이미 장가를 들어 고운 자부들을 보았으나 아직 손자들은 없었다. 이제 막내아들의 장가들 일에 집안 대소가에선 마땅한 규수감을 구하는 일로 분분했다. 그런데 그보 다 더 큰일이 일어났으니 홍진사가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례를 치루기 위해 지관을 모셔왔다. 헌데 지관은 묘터를 잡기전에 상제들 앞에서 매우 난처해 하는 것이었다. 아들들은 무슨 연유인지 꺼리낌없이 밝혀 달라고 요청했다. 지관은 "만약 장례를 치 루게 되면 3년 내로 아들 3형제는 모두 죽을것이오. 그러나 후세에는 반드시 큰 인물이 나리다" 고 하였다. 이말에 홍진사댁은 발칵 뒤집혔다. 과연 장례를 치뤄야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에 의견 이 분붆ㅆ다. 맏이와 둘째아들은 후대를 이을 아들이 하나도 없이 모두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장례를 치루지 말자고 우겼고 막내는 아버님의 유택을 마련하지 못함은 불효라하여 어찌 장례를 치루지 않고 시체를 그냥 두수 있느냐고 막무가내로 우겼다. 막내아들의 의견대로 결국은 장례 를 치루게 되어 지관이 정한 자리에 무덤을 썼다. 1년후 소상때 모인 마을 사람들은 그때까지 아무런 변고가 없는 홍진사댁을 보고 지관이 거짓말을 했는가 의아해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맏 아들이 원일모를 병으로 급사하고 말았다. 그후 대항땐 둘째 아들이 역시 원인모를 병으로 죽었 는데 슬하에는 모두 자녀가 없었다. 지관의 말대로 2년만에 남편들이 죽고 청상과부가된 두 며 느리는 신세타령을 하기에는 사태가 급해졌다. 바로 시동생문제였다. 두며느리는 시동생을 불러 이대로 있으면 멀지 않아 죽을 것이며 이대로 죽으면 홍씨가문은 영영 끊어져버리고 마니 마음대 로 액운이 들은 고향을 떠나라고 했다.
집을 나선 청년은 그길로 한양으로 올라갔다. 신분을 감 추고 문전걸식하며 지내던 중 요행이 어떤 큰 대감댁 하인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하인은 어딘 지 품위가 있었고 태도와 범절에도 다른 하인들과는 다른데가 있고 밤늦도록 글을 읽기도하여 주 인은 그를 심상치 않게 여겼다. 마침 그댁에는 과년한 딸이 있었는데 청년의 남다름을 보고 남 몰래 사모하게 되었다. 홀로 그리워하던 중 그해도 다 가는 늦가을 밤이었다. 가을 밤은 심회의 적막감을 더욱 깊이하여 청년에 대한 사모의 정이 샘솟듯 솟아나는 것이었다. 딸은 음식상을 해 들고 청년의 방을 찾아갔다. 청년은 주인의 딸이 찾아온 것을 짐짖 꾸짖었으나 마음은 이미 서 로 사모하고 있었던지라 음식과 술을 나무며 운우의 정을 통하게 되었다. 물론 청년은 왜 자신 이 이렇게 살고 있는지 그 자초지종을 처녀에게 자세히 얘기했다. 새벽녘이 되어 지난 밤의 따 뜻한 저에 아직도 가슴이 뛰던 딸은 청년에게 혼례에 대한 말을 하였는데 아무 반응이 없자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나 흔들어보니 이게 웬일인가 청년은 피를 토하고 죽어있는게 아닌가 뜻하지 않 은 변을 당한 주인은 남몰래 청년의 시체를 싸서 딸로 하여금 경상도 안동으로 내려가게 했다. 한편 시동생을 내 보낸 두과부는 오직 시동생이 성공하여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가 객사하여 돌 아온 시동생을 보고 까무러지는 듯 놀랐다. 홍진사의 무덤밑으로 세아들을 나란히 장사한 며느 리들은 하늘과 조상을 원망하며 한없이 울었다. 그런데 이 홍진사의 막내며느리는 천우신조로 하룻밤으로 태기를 얻어 열달이 지나 세쌍둥이의 아들을 낳았다. 막내 며느리는 꿈에서 아버지 로부터 세사람이 그 아들을 하나씩 맡아 기르도록 부탁하였다하며 가장 먼저 태어난 아들을 맏형 에게 그다음을 둘째형에게 맡기도 막내는 자기가 맡아 길렀다. 세쌍둥이는 모두 기개가 뛰어나고 학문과 재주가 비상하며 우애 또한 깊었다. 이들은 모두 장성하며 첫째는 목사 둘째는 현감 셋 째는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일생을 조상이 묻힌 땅에서 번창하여 살다가 그들 또한 조상이 묻힌 옆에 묻히었다. 아직도 그들이 공부하던 낙동강변의 창한루가 낡았으나, 의연한 자태로 남아있어 그 시점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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