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문화유적과 어우러진 마음의 고향
이 건물은 보백당 김계행(寶白堂 金係行)공의 정자이다. 1500년(연산군 6)에 건립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중수를 거치면서 다소 변형된 듯 일부는 조선후기 양식을 보이는 부분도 있다.
선생은 조선 초의 문신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땅으로 낙향했다. 그 후 설못(현 소산2리)가에 조그마한 정자를 지었으나 길옆인 관계로 더욱 조용한 장소를 찾아 이 정자를 건립하였다.
길안면 묵계서원에서 개울건너 산곡간에 들어서면 웅장한 계곡에 반석위로 폭포를 동반한 곡간수(谷澗水)가 흐르는 절경을 이루는 곳에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정자의 전면쪽 3칸은 삼면이 개방된 누마루형식으로 누각 주위 삼면에는 계자각난간을 돌렸다.
뒤쪽 3칸은 어칸이 마루로 전면의 누마루와 연접되어 있으며 후벽의 문하부는 궁판이 높직하게 끼워져 있다. 양 퇴칸은 온돌방을 들였는데 방의 앞부분은 일반적인 쌍여닫이 세 살문을 달았으나 마루쪽으로는 띠살무늬의 세짝 들어열개문이 설치되어 있다. 전면쪽을 고스란히 개방하여 툇마루로 구성한 예는 흔하지 않으며, 약계정과 유사한 평면형식을 보이고 있다.
기둥 상부에는 연봉장식이 가미된 2익공양식의 촛가지가 돌출되어 있어 조선후기 작품으로 간주되지만 말기의 번잡한 양식과는 달리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창방위에는 연꽃을 새긴 화반을 놓았는데 비교적 공을 들여 조각하였다. 상부는 5량가로 대량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놓았으며 그 위에 제형판대공을 올렸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으로 처마앙곡과 안허리가 매우 날카로워 정자의 맛을 더욱 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