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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학문과 예의를 숭상했던 유교문화의 맥! 민속문화의 보고!!

안동의 인물

안동의 인물

조목

분류 :
문화 > 인물
상세설명

설명

이조 선조때 학자인 조공의 자는 사경, 호는 월천이오 본관은 횡성이다. 대춘공의 아들로 1524년(중종 19)에 예안에서 태어나서 1552(명종 7) 2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처음 동몽교관으로 추천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또 공릉참봉에 보직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고 집현전 참봉으로 취임하였으나 곧 사퇴하고 돌아왔다. 다시 이조낭청의 6품직을 거쳐 봉화현감이 되어 향교를 중수하였고, 1594년(선조 27) 군자감 주부를 제수하매 진소하여 말하기를 "강화의 설은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백만의 군병을 이끌고 우리의 생명을 도륙하고 국조의 능침을 훼손 파괴하며 돌아가지 않는 왜놈들에게 강화가 웬 말입니까? 고인은 한 여단의 군인으로 중흥을 이루었거늘 청컨데 덕을 닦아서 격천하고 인을 베풀어 무민함이 양이의 근본입니다"하였다. 또 장악원정, 사재감정을 거쳐 공조참의에 이르러 사퇴하였다.
일찍이 퇴계 선생의 제자로서 문장이 당세에 뛰어났다. 천성이 근엄하고 독실하여 언제나 밝기전에 일어나 사당에 배례하고 책을 탐독하기 시작하면 침식을 잊었고, 책이란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성현의 훈화를 소책자에 기록하여 곤지잡록이라 하였다. 공의 미질은 퇴도를 만나 성취하였고 퇴계의 도학은 공을 얻어 빛이 났다. 1570년(선조 3) 퇴계선생이 하세하니 기복하고 소행을 3년하였다. 1553년(명종 8)에 공이 선공상을 당하여 묘지에 여막을 짓고 끼까지 죽과 소금만 들고 장을 먹지 않으니 수척하여 겨우 연명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대학은 다만 지. 행 두자뿐이라 격물치지는 지에 속하고 성의 정심 수신은 행에 속하며 제가치국 평천하는 추행의 이라"하였다. 만약 일자 일구라도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퇴도선생에게 뜻을 알아 관통한 뒤에야 그만 두었다.

이선생이 초록한 주저서 절요중에 후학에게 긴요한 것을 발초하여 책을 만들어 공과에 도움을 주었다. 임진왜란중에 유리동서할때라도 교회함을 잊지 않고 말하기를 "중국 송나라 육수부는 남해의 배속에서도 강학하고 강독함을 잊지 않았다" 하였다. 공의 성품이 근신하고 엄격하며 또 심후하였고 실천 궁행함이 단정무실하여 천진과 자연을 좋아하고 인위적으로 교식함을 싫어하고 어려서부터 현사부 아래서 보고 듣는 것이 전락과 예의이니 발언하고 행사함이 스승에게 배우지 않음이 없으니 자연히 순화됨이라 하겠다. 1606년(선조 39)에 별세하니 수가 83세이다. 예안 도산서원 상덕사 퇴도이선생의 문묘에 월천조공은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