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헌-안동의 인물 - 문화유산 - 안동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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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학문과 예의를 숭상했던 유교문화의 맥! 민속문화의 보고!!

안동의 인물

안동의 인물

김상헌

분류 :
문화 > 인물
상세설명

자원설명

공의 자는 숙도, 호는 청음.석실산인, 본관을 안동, 도정 극효의 아들이며 윤근수의 문인이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와 1608년(광해군 즉위) 문과중시에 각각 급제하고 정언.교리.직제학 등을 역임하고 1615년(광해군 7)공이 지은 공성왕후 책봉 고명사은전문이 왕의 뜻에 거슬리어 파직되었다. 공은 서인으로 인조반정에 공이 있는 김유 이귀의 공서파에 대하여 그들이 세력을 부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청서파 영수로서 1624년(인조 2) 다시 등용되어 대사간.도승지.대사성. 대제학을 거쳐 예조. 공조. 형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때 판서로서 비변사 당상을 겸하였다. 그때 화의를 극력 반대하여 기초중인 국서를 찢고 통곡했다. 끝내 화의가 성립되자 그로 인하여 심양에 잡혀가 심문을 받았으나 시종 굽히지 않았으므로 3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고 청나라 사람들도 그의 충절에 감동하여 돌려보냈다. 그때 명나라와 내통한 죄목으로 잡혀 온 주화신 지천 최명길공과 척화신 청음 김상헌공이 같은 옥에 우연히 갇히게 되었다. 따라서 서로 문초 당하는 것도 들었다. 지천은 청음이 이름을 후세에 날리기 위하여 척화를 고집한 것으로 오해했으나 지금 잡혀와서도 여전히 굳굳하게 대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충의의 선비인 것을 알았다. 김공도 최지천이 송나라 진회와 같이 화의 함으로써 나라를 망칠 줄 알았더니 어느덧 명나라와 내통하여 잡혀온 것을 보고 오해가 가시었다. 청음이 먼저 "여보 지천대감, 내가 지금까지 대감을 잘못 생각했소이다 용서하시오." 지천도 "허허 나도 청음대감의 고지식한 것이 구부러지지 않는 것을 알았소이다." 하고 서로 웃었다.
두사람의 길은 한곳이었으나 다만 그 가는 길이 다를 뿐이고 만나는 곳은 일반이었다. 김공은 "조용히 두 사람의 생각을 찾아볼 때 백년의 의심이 풀리는구려"하는 시를 읊어 보냈다. 최공도 "그대의 마음은 돌같 이 단단하여 돌릴 줄 모르네만 이내 길은 둥글둥글 오로지 한 길만을"하고 답시를 보냈다. 장소는 비록 적국의 감옥이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더욱 깊어 갔다. 용골대는 응당 두 사람을 참형에 처할 것으로 알고 "폐하, 두 사람은 조선에서 명성이 높은 자들이요. 일벌백계의 견지에서 중형에 처하도록 하시오."하고 품하였으나 청태종은 "충신을 죽이는 것이 황제의 덕에 해가 되지 않을까. 그자들의 소행은 죽일 것이나 호생지덕을 베풀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용골대가 와서 두사람을 보고 "용서하니 황성이 있는 쪽으로 서향재배하고 사은하라"하니 최명길은 용골대의 뜻에 따랐으나 김공은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거절하였다. "대단한 고집이구나" 용골대도 칭찬인지 경멸인지 알지 못할 소리를 하고 나갔다. 공은 그후 풍산 소산동 청원루에 은거했다. 공은 문신으로 명필로 이름이 높았고 동기창체를 잘 썼으며, 효종 묘정에 배향되고 그의 유적이 있는 곳마다 서원을 세워 봉향했다. 안동에는 서간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공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