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정-안동의 인물 - 문화유산 - 안동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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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학문과 예의를 숭상했던 유교문화의 맥! 민속문화의 보고!!

안동의 인물

안동의 인물

이상정

분류 :
문화 > 인물
상세설명

자원설명

공의 자는 경문, 호는 대산이오 본관은 한산이니 1711년(숙종 37)에 태화의 아들로 태어났다. 외조부 이재의 문인이다. 1735년(영조 11)사마시를 거쳐 증광무과에 급제하여 지평 형조 참의에 올라 사직했다. 정조대왕은 세자로 있을때 부터 이미 공이 유림의 제일인 것을 알더니 친히 뽑아 써서 수년사 이어 세번 옮겨 2품계에 올랐으며 조정을 문치로 장식하고자 옥음을 내려 달래어 한번 보고자 하고 혹은 연신에게 명하여 글을 보내어 나오기를 권하니 왕의 배려함이 이같이 지극하였다. 공은 이에 대하여 "몸이 나가지 못하면 글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이 역시 사람된 도리다" 하고 구조의 소를 올렸는데 앞에 5조는 왕의 덕을 의논한 것이오 뒤에 4조는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논한 것이었다. 이에 임금이 비답하기를 "9조가 자구마다 간절하고 극진하여 좌우명이 될만하니 관성하는 자료로 삼을 것이다"하였다.
일찍부터 공은 학문에 뜻을 두어 안동 대석산 기슭에 대산서당을 짓고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여성리학을 연구하는 한편 후진을 양성했다. 공은 몸이 옷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도에 나가는 용맹은 분육이라도 그 뜻을 뺏지 못하고 말이 입밖에 나오지 않는 것 같으나 이치를 설명할때는 그 정함이 누에고치에서 나오는 명주실과 같아서 그 성한 모습은 엄연히 덕을 갖추었으니 공이 비록 별세하였으나 영유의 말이 겸손하고 용모가 단정하게 보이는 자는 묻지 않아도 의레이 그가 대산공의 문인임을 알수 있었다 한다. 친구와 문인들이 공의 언행을 모방하여 칭술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으며 "도산이 적전을 얻었다" 하였으니 이것은 잘못된 말이 아닐 것이다.
공은 말하기를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그에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가지 착한 일로 이름을 이루지는 않겠다"라고하여 산림에 들어가 3~40년간 하루도 공맹 정주의 글을 읽지 않는 날이 없고 잠깐 동안도 존양하고 성찰하는 공부를 쉬지 않았으며 저울로 단것 같고 자로 잰 것같이 하여 문로가 단정하여 흠모하는 사람이 많았다. 찰방으로 있을 때 몸을 얼음같이 깨끗이 하고 수령으로 있어 치화가 백성들에게 흡족하였다. 일찍이 아우 광정에게 이르기를 "분수를 따라 수습해서 후학을 면진하라"하고 또 "자제들을 가르칠 때 본분에 의해서 유가의 의미를 잃지 말라"하였다. 저술로는 약중편, 제양록, 경재집해, 주자절요성서, 사칠설등이 있다. 1781년(정조 5)에 별세하니 유덕을 추모하여 1789년(정조 13) 고산서원에 봉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