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영-안동의 인물 - 문화유산 - 안동관광

7℃
안동날씨
미세먼지 11㎛/㎥(좋음)
안동관광 모바일 검색

문화유산 학문과 예의를 숭상했던 유교문화의 맥! 민속문화의 보고!!

안동의 인물

안동의 인물

이원영

분류 :
문화 > 인물
상세설명

자원설명

민족의 재건과 기독교 전파에 힘쓴 봉경 이 원영 목사 안동시 금곡동에 위치한 서부교회는 이원영목사가 마지막까지 목사로서 소임을 다하던 곳이다. 이 교회의 비탈에 이원영목사 기념비가 나지막하게 서 있다.
이 기념비에는 ′훌륭한 가문 고귀한 명성 영광스러운 성직 실로 값진 것을 한몸에 지닌 자랑스럽던 한 인물의 생애 그는 일제의 복정 아래 수없이 투옥을 당하시며 오로지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걸어가셨다 그 독실한 믿음 고결한 인격 온유 겸손한 성품 충성된 나라님의 종 늘 우러러 존경합니다′ 라는 비문이 적혀있다.
이원영목사는 1886년 (고종23년) 7월 3일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서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손으로 전통적인 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용모가 수려하고 성품이 온유하며 또한 총명하여 만 15세때 사서오경을 통독하였다고 한다. 그는 34세가 되던 1919년 3월 16일, 도산면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사람들을 풀어달라고 시위하던 중 체포당했다.그후 그는 대구 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역시 1년형으로 판결이 나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의 상고장에는 ′···부모의 생사를 알지 못하던 중 부모의 생존을 알게되면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놀라서 일어나는 것은 인지사정이며 인도의 정의라, 세계 인류중 인자이면 다 나와 같은 경우일 것이며 본 피고인은 대한민국 2천만분이라,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것은 자유의 천부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며 자유의 영구평화를 열망하는 것이다. 우리한국의 평화는 곧 동양의 평화, 세계의 평화이므로 예비 축하를 한 사실은 악의와 불온 언동이 아니며, 따라서 보안법 위반이 아니므로 상고한다.′고 적혀있다. 이는 그의 대담한 기질과 백절불굴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다.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동안 그는 동향인 이상동 장로를 통해 35세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출옥후에는 혼자 성경을 공부하면서 도산에서 20리나 되는 예안교회에 다녔다. 그러나 그의 문중에서는 퇴계 선조의 후예가 예수교를 믿는다는 것은 국가나 사회에 대한 수치요, 조상에 대한 용납 못할 죄인이라며 문중 밖으로 축출하고 족보에서 제명하겠다고 위협을 가했다. 이런 핍박속에서도 그는 1920년 도산서원 건너편 염촌이라는 곳에 아담한 초가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문중의 어른들이 도끼를 들고 와 교회기둥을 찍고 파손시킨 것이 여러번이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1921년 권찬영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1925년 안동 성경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0년에는 평양 신학교를 졸업, 그해 12월 목사로 임직받고 현 안동서부교회를 담임하였다. 성직자가 된 이원영 목사에게는 또 하나의 커다란 시련이 다가왔다.

그것은 일제에 의해 기독교 말살정책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이었다. 일제는 1938년 2월 9일 교세가 가장 강하던 평북노회에 신사참배를 강제로 가결시켰고, 1938년 8월 31일에는 전국 23노회 중 17노회가 신사참배를 시인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백여개의 교회와 미션스쿨은 문을 닫았다. 1939년 5월 31일 이원영 목사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하여 안동 경찰서에 피검되었고 혹독한 고문과 혹형으로 학질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왜경은 하는 수 없이 그를 석방시켰다.
그는 이때부터 해방되기까지 4차례에 걸쳐 투옥이 되나 오히려 수감기간 중에 70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였다. 해방 후, 그는 민족의 재건과 교회부흥에 심혈을 기울이며 경안고등성경학원을 창설하여 수많은 교역자를 양성하였으며, 1954년 4월 23일 목사로서는 최고 영에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39대 총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1955년 11월 23일 과로와 노쇠, 일제의 옥고로 인한 질환이 발병하여 3년간의 투병생활을 하였다.
당시 경안고등성경학원 학생에 의하면 그는 중풍으로 수족을 가누기 어려웠고 언어장애가 심했지만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주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고 한다. 일제시대 만연했던 신사 참배의 결의를 취소하였고, 온 교회들이 지난 잘못을 회개하도록 총회를 이끌었던 이원영 목사는 1958년 6월 21일 73세로 소천하기까지 목사로서의 소임을 다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해박한 전문지식을 갖추고 있으며, 신사적이고, 예의바르며, 누구에게나 친철하고, 어린이에게도 존칭을 사용하였으며, 유머감각 또한 뛰어나서 모든 사람에게 다정다감함을 보여주는 인간미를 가진 분′ 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원영 목사는 성직자로서 어떤 협박과 폭력에도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학세력이 강했던 안동지역에 기독교가 뿌리내리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